‘지나치게 나가는’ 오늘의 이단들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성경전서 새번역)

{ 만도 1과 } 요한이서 1장 6-10절 …. [6]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야말로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8] 여러분은 스스로 삼가서, 우리가 수고하여 맺은 열매를 잃지 말고, 충분히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9] 지나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다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10]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이 가르침과는 다른 것을 전하거든, 그 사람을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 [11]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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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지나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복음에서 떠난 사람’, 즉 ‘여러 가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요한이서’가 작성되던 시기, 곧 제1세기 말에 있었던 기독교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와 ‘도케티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희랍철학의 한 분파인데,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영적인 존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물체를 지니고 있지도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인체를 가질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아야 하므로, 세상에 살고 있었던 예수님은 영적 존재, 곧 하나님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도케티즘’은 예수님이 신적 존재라면, 인간이 지닌 인체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이 본 예수님은 ‘환영’(허울)에 불과했던 존재이며, 그 환영이 30여 년간 너울너울 땅위를 맴돌다가 하늘로 올라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환영’이었고, 그러므로 고통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엉터리 이론으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믿고 있었던 초대교회의 신앙을 마냥 흔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런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자들은 ‘아예 집에도 들이지 말라’, 심지어 ‘인사도 나누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본문 10-11절).

이들에게 속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요한이 안타깝고 조급한 마음에, 짧은 편지로라도 성도들에게 경계하는 말씀을 전했던 것이 바로 이 요한이서인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신앙의 골자를 다시 정리하기를, 첫째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리게 하셨다>(본문 7절)는 것, 둘째로 <예수님의 계명, 곧 사랑의 계명에 착념하고 이를 행하며 산다면, 거짓 복음에 따라다니지 않게 될 것>(본문 6절)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오늘의 “지나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아,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아니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다시 존 스토트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그가 그의 마지막 저서 ‘제자도’에서 말하는 우리 시대의 ‘맞서야만 할 현대의 풍조’를 추려 말씀드립니다.

가. 종교다원주의는 ‘맞서야 할 풍조’입니다. 구원은 기독교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다고 보는 주장이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그들은 다른 종교를 믿어도 진실되게만 믿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진정 성도들을 방황하게 만드는 거짓 복음입니다.

나. 물질주의는 ‘맞서야 할 풍조’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물질의 부자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거짓 복음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성도들을 검소하고, 관대하며, 자족하는 생활을 익히게 만듭니다. 혹 부자로 살게 하시지만, 이것 역시 그들을 통하여 물질이 관리되기를 바라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지, 누리라고만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다. 윤리적 상대주의는 ‘맞서야 할 풍조’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윤리적 기준이 바뀔 수가 있다고, 그것이 융통성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 복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살아나갈 기준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은 불변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달라져도 변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성윤리에 있어서 오늘의 풍조는 너무나 ‘지나치게 나가’ 있습니다. 동성애가 그 한 예입니다.

라. 나르시시즘은 ‘맞서야 할 풍조’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아’에 도취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이웃 사랑만 하지 말고,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이따위 것을 기독교 정신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 복음입니다. 교회성장주의, 뉴에이지운동, 그 밖에 심리치료에 관련된 프로그람들이 대부분 이런 거짓 복음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교회의 존재 목적을 죄를 회개하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하는 일에서 떠나 수양의 방법, 명상, 인권, 평등, 사회이념, 성공 등 이런 세속적 관심으로 몰고 가는 현상들은 거짓 복음의 여파들일 수 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2천 년 전 사도 요한의 말씀으로 오늘의 저희들이 재각성하여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복음에서 떠나도록 유혹하는 모든 위험한 이단적 요소들을 잘 분별하여,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저희의 갈 길을 찾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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