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들아, 죽음을 절대시 말라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서신 차용 } 사도행전 9장 39-42절 …. [39] 그래서 베드로는 곧 그들을 따라 나섰다. 베드로가 요빠에 이르자 사람들이 그를 이층 방으로 안내하였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몰려와서 울며 도르가가 살아 있을 때에 만들어두었던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었다. [40] 베드로는 사람들을 방에서 모두 내보낸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나서 시체쪽으로 돌아서며 “다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는 눈을 뜨고 베드로를 바라보며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다시 살아난 도르가를 보여주었다. [42] 이 소문이 온 요빠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다.

{ 복음 } 요한복음 6장 66-69절 …. [66] 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69]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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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 ) 예수님의 공생애에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 세 토막의 이야기가 복음서에 실려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도착할 무렵 이미 죽은 상태에 있었습니다(마 9:18-26).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 그의 장례 행렬이 동네를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눅 7:11-17). 예수님과 친근했던 베다니의 나사로는 죽어 장례를 지내고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요 11:1-44).

이 세 사람이 모두 예수님의 권능을 힘입어 죽음을 벗어났고, 생명을 되찾아, 그들의 삶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상상력으로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살았던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우리들이 생각하지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우리들의 지식이나 경험의 저편에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세 번을 보여주신, 죽은 자가 다시 ‘환생’(*이 말이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음)하는 일을 왜 우리 인생들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그 세 사람이 세상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을 사별한 가족들의 딱한 사정 때문에 그러셨을까요?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을 살려내신 예수님의 목적은 ‘죽음의 권위’를 너무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 죽음의 권위를 훨씬 뛰어넘으시는 하느님이 계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 2 ) 오늘의 본문에는 사도 베드로가, 마치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권능을 힘입어 요빠 성의 죽은 다비타를 되살려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다비타는 훌륭한 신앙생활을 했던 여성도였다고 누누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이, 다비타를 데려가신 하느님께 대한 탄원이 베드로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베드로로 하여금 다비타를 되살려야 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살려내신 분은 하느님이셨고, 베드로는 하느님의 결심에 순종했을 뿐이라고 봅니다. 초대교회가 누린 축복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3 ) 오늘의 복음본문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차 수난을 당하시고 대속의 제물로 죽음을 당하시게 될 것과 하늘나라로 돌아가실 일을 예언하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자청하고 나섰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런 죽음의 예언을 들으면서, 그들이 기대했던 ‘다윗 왕조의 회복’의 꿈은 물 건너갔다고 여겼는지, 하나 둘 술술 빠져서 자기들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열두 제자들이 보기에도 꽤나 역할을 할 것 같았던 이들도 맥없이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불안한 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도 가려느냐?” 예리한 질문이셨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마음 속에 ‘우리도 지금 돌아가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묻는 질문이셨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역시 모범답안을 말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저희가 누구를 찾아간단 말씀이십니까?”

‘진리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도 아니고, “영생의 말씀”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는 뜻인 것 아닙니까?

( 4 ) 중국의 기독교인들의 수는 대략 1억 3천만 정도로 추산합니다. 현재 중국 공산당 정부는 기독교의 성장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고 있지만,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영향력이 큰 사람들은 수없이 제거되고 있습니다.

또 성직후보자에게 왜곡된 신학교육을 하고 있고, 또 어린이주일학교와 청소년의 교육을 폐지하며, 성경이나 기독교서적의 발행을 금지하고, 교회당 건물의 십자가도 강제로 철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갈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건재하고, 오히려 이런 저런 방법으로 교회의 보존과 지속적인 전도를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세월이 어떻게 변하든 세상나라들은 멸망할지언정 하느님의 교회는 왕성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기도> 주 하느님, 저희가 자칫 죽음이 우리들의 끝인 것처럼, 절대시하며 두려워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이 끝이 아닌 확증을 보여 주셨사오니, 저희가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며, 영원을 사는 자답게 진리와 정의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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