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비복음적 주장이 없나?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서신 차용 } 사도행전 15장 1-2, 6-7, 9-13, 19-20절 …. [1] 그 무렵 유다에서 몇몇 사람이 안티오키아에 내려와 교우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2] 그래서 바울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와 그들 사이에 격렬한 의견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는 바울로와 바르나바와 몇몇 신도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서 다른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 [6]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회의를 열었다. [7] 오랜 토론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9] “그리고 그들(*이방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의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하지 못했던 멍에를 그 신도들의 목에 메워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간섭하려 드는 것입니까? [11] 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주 예수의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12] 이 말을 듣고 온 회중은 조용해졌다. … [13] 두 사도(*바르나바와 바울로)가 말을 마치자 야고보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 [19] 그러므로 내 의견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 [20] 다만 우상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고 목 졸라 죽은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편지를 띄웠으면 합니다.”

~~~~~

* = * ( 1 ) 주후 제1세기에 율법주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옛 바리사이파의 주장을 따라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여,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할례(*음경포피절제수술)를 받는 것이 맞다고 역설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땅에 유다인 기독교인이 그런 주장을 펼치고 다닌다 해도,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1세기 초대교회 시절에는 이런 주장이 먹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고(창 17:7 이하), 그래야 구원의 백성이 되는 것이니, 이런 주장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지금까지 대대로 지켜왔던 그들의 믿음과 부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비복음적이고, 비논리적인 주장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교우들이 한 데 모인 자리에서 토론한 후, 이에 대한 복음적 규명을 정확하게 내려 준 일이 오늘의 본문, 사도행전 15장에 상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합의의 근본은, 구원은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때문이지, 그 밖의 무엇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강한 논리입니다.

할례? 그것은 아브라함과 모세 때에 필요한 것이었지, 온 세계민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 아닌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2 ) 인간은 겉모양으로 구원의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 7:21)고 했고, “유다인이 겉모양만 갖추었다 해서 참 유다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몸에 할례의 흔적을 지녔다고 해서 참 할례를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롬 2:28-29)

구원의 백성은 할례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롬 10:9) 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할례파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고쳐 주기 위해서 작성된 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허물어버린’ 율법조항에 속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갈 2:18).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갈 2:19-20)이라 했습니다.

( 3 )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복음을 대신하여, 제1세기 할례파들 처럼 비복음적인 주장들을 내세우는 일은 없을까요?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모양만 갖추고 비복음적인 요소를 복음의 진수인 것 처럼 내세울 수도 있음을 명심합시다.

가) 예전을 따르고 있다고 구원받은 것으로 오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례전(세례, 성찬례, 견진, 고해 등)을 받았으니, 나의 구원은 완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 교회 출석을 잘하고 교회 활동에 잘 참예한다고 내 신앙은 만족스럽다고 자부해도 되는 것일까요?

다) 도덕적인 인간이면, 또는 내 양심상, 아무런 거리낌만 없다면 나는 의인이고, 구원의 백성으로 자인해도 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라) 우리 교단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건 우리 교단, 우리 교회의 어떤 점에 근거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참으로 이 시대의 ‘할례파들’(비복음적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내용도 다양하고 숫자의 범위도 넓게 ‘할례’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기도> 주 하느님, 십자가 복음이 아닌 것으로써 신앙생활을 평가하지 말게 도와 주시옵소서. 오로지 주님의 대속의 보혈 만이 구원의 효험이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