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믿음을 키우기 위한 것

<퍼트의 윌리엄 기념일,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갈라디아서 5장 6절 } …. [6] 사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치렀느냐 치르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 마태오복음서 8장 5-10절 } …. [5] 예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간청하였다. [6]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겠소.” [8] 그러자 백인대장이 대답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이고, 제 밑으로도 병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부하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감탄하시며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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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후 12세기에 스코틀란드 퍼트 지방 출신으로 윌리엄이라는 빵 굽는 이가 살았습니다. 그는 신실한 신자로서, 매일 빵을 구으면서 열번째 빵을 구울 때마다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기 위해 구웠습니다.

또 그는 한 어린 사내아기가 길에 버려진 것을 보고서, 그 아기를 안고 자기 집으로 데려다 양자로 키웠습니다.

그 양자가 청년이 되었을 때에, 그 아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려고 떠났는데, 영국 남쪽 캔터베리로 향하던 길에서 그의 양자의 손에 그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윌리엄 교우를 기억하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그러기에 부모도 키우기 싫다고 버린 남의 자식을 뭣 하러 데려다가 양자로 삼는단 말인가?” 또는 “자기가 벌어서 자기나 잘 먹고 잘 살면 됐지, 남에게 자선이다, 긍휼이다 하면서 애쓸 필요가 없다니까..” 이런 말들을 할 것입니다.

또 양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마우신 어른을 왜 살해할 생각이 났을까? 여행길에 나선 어르신의 수중에 꽤 많은 금품이 있었겠지만, 그 어른이 양아버지니까, 지금 욕심 내지 않아도 나중에 다 자기 몫이 될 터인데, 왜 그런 분을 죽였을까?’ 라고 말입니다.

혹은 그 무렵 양자의 맘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어떤 분노가 생겼던 것은 아닐까요? 또는, 지금 당장 수중에 돈이 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충동적 욕심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그 당시 무슨 일로 양아버지에게서 불신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2천 년 전, 하늘 보좌를 두고서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갖은 고초를 겪으시다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소.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여러분은 나의 친구가 됩니다.(요 15:13-14)” 라고 사랑의 높은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윌리엄이 쓰라린 사랑의 배반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예수님의 사랑의 의지를 닮아, 윌리엄의 사랑이 끝끝내 변함이 없었을 것으로 상상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자비의 행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비록 사랑의 배반을 당하더라도, 우리들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고, 포기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은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 투성이의 세상 속에서 가장 귀한 믿음을 싹 틔우고 키우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실만큼 저희 인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 저희가 사랑의 사람들로 세상을 살아, 이 신의가 메마른 세상 속에서 <믿음>을 싹 틔우고 키워내는 자들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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