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서신 차용 } 사도행전 17장 29-34절 …. [29]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사람의 기술이나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가지고 만들어낸 우상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무지했던 때에는 눈을 감아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는 사람에게나 다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31] 과연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분을 시켜 온 세상을 올바르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또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32]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듣고 바울로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훗날 다시 그 이야기를 듣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33] 바울로가 법정에서 나오자 [34] 몇몇 사람이 바울로 편이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중에는 아레오파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니시오를 비롯하여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밖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
* = * 멀쩡한 사람들(*바울과 실라)이 자기 돈을 들여 먼 나라인 마케도니아까지 와서, 뭔가 그들이 먼저 깨달은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것을 존경스럽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매너가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류사에 남을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출한 문화의 도시 아데네 사람들 답게,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새로운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호기심이 한계에 다다른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들(바울과 실라)이 전하고 있는 초월적인 분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아데네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이구머니나!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믿는다구? 사교(거짓 종교)구먼!’ 이렇게 판단을 내리고는 더 관심을 보이기 싫어, 조용히 자리를 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1세기의 풍경이었지만, 오늘날까지 기독교가 전하는 몇 가지 기본교리들에 대해 우리는 냉혹한 거부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인간영혼의 불멸성, 부활, 이 세 가지는 하나의 세트로서, 그 중의 하나만 믿어도 전체를 믿게 되고, 하나라도 거부하면 세 가지 모두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가치, 곧 사랑, 용서, 인내와 헌신, 이타적 삶, 정의와 평화, 교회가 이런 주제의 말을 하고 있을 때에는 곧잘 관심을 보이지마는, 하느님의 존재, 영혼불멸, 부활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그런 허무맹랑한 말은 내가 없을 때에 하시지요’ 하며 자리를 뜹니다.
제1세기 교회도 똑같은 난관에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부활 이야기만 하지 않아도 믿겠는데..’ 이 말은 하나도 믿지 않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부활 이야기 빼놓고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부활 없이는, 세상의 도덕윤리 강좌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의 증거자들은, 부활을 말재주로 알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본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 후에 무덤에서 살아나온 것을 그들의 두 눈으로 본 대로 말했고,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의 장례행렬이 성문을 나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다시 살아나게 된 이야기를 그들이 본 대로 말했고, 회당장 야이로의 이미 숨을 거둔 딸을 예수님께서 ‘달리다 쿰’ 하여 살려내신 이야기를 그들이 본 대로 전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부활의 증언은 성경 속에 실려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공생애 속에서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항목입니다. 과학적 입증을 할 방도를 찾지 않습니다. 2천 년 동안 무신론자들 곧 부활-영생을 거부하는 자들과 말로 싸워 보았지만 논쟁에서는 하나도 얻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을 사랑하시기를 당신의 독생자를 죽음의 자리에까지 가게 하시며, 죄많은 우리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영생 복락에 이끌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와 관용을 고마와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토대인 것입니다.
한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매미들의 노래를 들어 보십시오. 그들의 전신은 ‘매미유충’이라고도 하는 굼벵이입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7년을 땅 속에서 나무 뿌리의 수액을 빨아먹으며 살다가, 마침내 허울을 벗고 날개를 달고는 대기 중에 나와서 한껏 여름을 노래하다가 갑니다. 그들이 유충으로 살 때에 이렇게 매미가 될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는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 훈련>을 짧게 받는 사람은 아주 짧게, 길게 받는 사람은 100년 씩이나 받다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날 하느님 앞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에 들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생긴 플롯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확실한 은총이요, 하느님의 설계입니다. 인간에게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다만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믿음의 삶입니다. 이 일을 돕기 위하여 하느님의 영, 곧 성령께서 우리들을 밀착 지도하시고 계십니다.
<기도> 주 하느님, 저희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부활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저희도 부활과 영생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