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의 말씀 묵상 > …………………….. (신복룡 신구약전서)
{ 서신 차용 } 사도행전 19장 1-7절 …. [1] 아폴로가 코린토에 있는 동안, 바울로는 여러 내륙 지방을 통하여 에페소로 내려갔다. 그 곳에서 제자 몇 사람을 만나 물었다. [2]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들이 대답했다.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3] 바울로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4] 바울로가 말했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를 믿으라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5]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 그리고 바울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했다. [7] 그들은 모두 여남은 사람 되었다.
{ 복음 } 마르코 복음서 10장 35-40절 ….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께 간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내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오?” [37] 그들이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저희 가운데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앉고,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무엇을 간청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소. 내가 마시는 잔을 여러분이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여러분이 받을 수 있겠소?” [39] 그들이 대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여러분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여러분도 받을 것이오. [40]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이미 마련된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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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신약성경은 세 가지의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로 주는 물세례, 성령의 임재를 기원하는 성령세례, 그리고 성도들이 세상사람들에게 당하는 ‘고난의 세례’가 있습니다.
( 1 ) 물로 받는 세례는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있어왔던 세례예식이었습니다. 특별히 광야나 외딴 지역에 나가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행하던 세례는 죄와 결별하려는 죄 씻김의 예식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던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주던 세례가 대표적인 물세례였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서신에서 ‘요한의 세례’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물세례를 받으셨겠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예식은 세례자의 권위로 주는 예식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입니다. 죄를 씻는 의미보다는, 아예 물에 몸을 장사 지내는 의미를 가집니다. 곧 옛 사람은 물 속에 장사하고, 이제 성삼위의 이름으로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교회의 세례입니다.
이 새로운 사람은 신분이 바뀌어 있습니다. 물론 사회생활을 위해 예전의 이름 곧 김아무, 이아무로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어, 예전적교회에서는 이름까지 새로 가집니다. 이제는 자기 뜻대로 사는 김아무 이아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속에서 그의 생애를 대신 살아 주시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 2 ) 성령세례에 관한 말씀이 오늘의 사도행전 본문입니다. 에페소 교우들에게 바울로 사도가 성령세례를 받았는가고 묻습니다. 그들이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성령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라고 했으니(요 1:33),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영적 사역을 담당하려면 누구나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이래 많은 복음전파자들이 성도들에게 성령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힘이 되었고, 이 성령세례로 성도들은 활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교회 안에서 많은 혼돈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누구에게서 성령세례를 받으면 영적 효력이 크고 누구에게서 받으면 아무 효력이 없다는 등의 혼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혼돈을 정리하기 위해서, 주교 만이 성령세례를 전담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이를 ‘견진성사’라 하여 주교에게 한정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견진성사의 기도문에 “주여, 이 종(아무아무)에게 성령을 내리소서. 그 믿음을 강건하게 하시고 한평생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주교의 안수 기도문)라고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견진성사를 필해야 성찬식에서 배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마치 ‘배찬 라이선스’를 받는 예식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본래는 성령임재기원예식입니다.
그래서 견진성사마저도 교회의 성령세례로 안착되지 못했습니다. 견진성사를 받고서도, 그것이 성령세례라는 사실을, 견진성사를 베푼 사람도, 받은 사람도 모르는 예가 허다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일반신자에게서 주교가 ‘성령세례’를 받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그것이 뭐 그렇게 잘 못된 일인가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주교가 베푸는 견진성사가 성령세례라는 사실을 교회사에서 배웠다면, 왜 잘못된 일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서 성령세례를 받든 간에, 모든 성도들이 다 성령세례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세례는 글자 그대로 성령께서 인간의 영혼에 임해 오시고, 그들의 영혼이 진정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영혼이 되어, 날마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온 누리에 퍼져 나가기를 기원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기원하는 사람은 먼저 철저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아, 죄와 악령의 종노릇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의 영혼에 성령께서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의 영혼에 임하시고 내주하셔서 날마다 그의 삶을 주장해 주시도록 간절히, 진정 간절히 빌어야 합니다.
( 3 ) 고난의 세례는 사람이 자청해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귀와 마귀의 졸도들이 성도들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고난의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복음을 증거한다든지, 마귀의 역사를 저지하기 위해서 영적 사역에 동원되고 있는 동안, 마귀와 마귀의 졸도들은 마구 성도들에게 고난의 세례를 퍼붓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 16:24)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십자가’ 란 죄를 대속하시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는 내용이 다릅니다. 인간이 지는 ‘자기 십자가’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의 심부름꾼이 되는 수고를 능동적으로 맡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십자가’와 ‘고난의 세례’는 일맥상통합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 생애에, 물세례로 죄악의 역사와 단호히 결별하게 하시고, 성령세례로 하나님의 영이 저희 영혼에 내주하시는 삶을 힘차게 살게 하시며,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저희의 수고를 사양하지 않아서, 세상이 주는 고난의 세례가 저희에게 큰 은혜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