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새 사명자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성경전서 새번역)

{ 서신 } 고린도후서 4장 7-12절 ….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8]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 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2]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 만도 2과 } 누가복음 19장 41-46절 … [41]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42]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43]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44]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45]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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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현대 과학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위협을 받고 있는 내용 역시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문가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대별됩니다.

“1) 전혀 통제가 불가능한 인공지능의 발달 현상, 2) 인구감소로 인해 선진국에서 점차 전문인력이 부족하게 되어간다, 3) 환경 파괴의 가속화 때문에 지구는 인류가 더 이상 살 수 없는 항성이 되어간다, 4) 거짓 정보와 조작된 정보의 범람으로 도저히 진실을 알 수 없다, 5) 다양한 우주전쟁의 전술무기들이 등장하여 인류가 누구의 오인과 실수에 의해 멸절될는지 알 수 없이 되었다.”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살고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서 소망을 거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일에 소망을 두고 계시는 한, 우리들은 낙심할 수 없습니다. 내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렘난트)들을 찾아,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은 하계재, 곧 각 계절에 성직후보자와 수도자들의 ‘성소’(하나님의 부르심)를 위해 기도하는 기간의 첫 날입니다.

세월은 바뀌었어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지금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 옛날 예루살렘의 운명을 내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 처럼, 울고 있을 것입니다.

가 )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복음본문 42절) 하면서 울고 있을 것입니다. 평화는 히브리 말로 ‘샬롬’인데, ‘샬롬’은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 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받은 사람 만이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입니다.

나 ) ‘강도의 소굴’(복음본문 45-46절)이 되어버린 ‘오늘의 성전’을 바라보며, 가슴이 쪼개지는 아픔을 가지고, ‘기도의 집’을 회복할 사명을 느끼는 사람들을 찾으실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의 전당이 되어가는 모습입니다. 죄와 구원이 화제가 아니라, ‘웰 비잉’, ‘인간존엄’이 화제입니다.

다 ) 다양하게 전문화 되어가는 오늘날, 어느 분야에서 인류의 운명이 판가름 날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누군가 ‘책임감있고 자기희생적인 전문가’ 만이 이 세상을 지탱해 낼 수 있는 영웅이 될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의 서신본문 11절의 말씀처럼, ‘예수의 생명이 자신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 만이 이룰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성직자들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그들의 대부분은 비성직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소’의 대상은 성직자나 수도자 만이 아니라, 이런 사명을 수행할 다양한 비성직의 ‘영웅’들일 것입니다. 시대가 그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이 시대의 주님의 제자들은 다만 성직자들 뿐만 아니고, 수많은 헌신적 비성직자들이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말세에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일으키옵소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지구를 처절한 파괴와 죽음의 벌판으로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리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을 일으키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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