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복음 } 마테오 복음서 7장 21-27절 ….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갑니다. [22] 그날이 오면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라고 할 것이오. [23] 그때 나는 그들에게 선언하기를, ‘나는 여러분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내게서 물러가시오. 불법을 일삼는 무리여!’ 라고 할 것이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자와 같을 것이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집에 들이쳤지만, 그들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무리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요.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집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 = * 어떤 철학이나 사상에서는 실천(혹은 ‘행위’, praxis)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에 노동, 작업, 행위(실천, praxis)의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노동’은 자신이 세운 특별한 목표가 없어도 삽이나 곡괭이를 들고 밭에 나가 땀 흘리며 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밭에서 어떤 작물을 얼마나 거두겠다는 목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고, 하나의 ‘작업’으로 인정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이 어떤 이념적 목표, 또는 정신적 가치를 성취하는 데에 기여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작업에서 승격하여 ‘행위’(또는 ‘실천’ praxis)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노동과 작업과 행위(실천)를 통해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데, 그 행위의 성격에 따라 ‘해방철학’, ‘변증법적 유물론’(마르크스주의 철학), ‘현상학적 철학’(실존철학)으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늘 나라의 복음 역시, 하나의 성취목표가 있어서, 믿음에 행동(실천)이 따름으로 참 믿음으로 인정됨을 오늘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으며,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사명이 있고,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 신앙과 사명은 삶(praxis)으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날마다의 생활에서 얼마나 그 실천(praxis)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실천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천이 없어서는 믿음도 없는 것이다.(본문 24-27절) 그러나 실천을 한다고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본문 22절) 그러므로 최대한 실천을 힘쓰면서도, 믿음의 자만을 마음에 품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우리는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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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세계교회가 기념하는 믿음의 선배 >> 로벗 레이턴 (Robert Leighton, Archbishop of Glasgow, 1611 – 1684) :
로벗 레이턴은, 청교도 계열의 의사이며 작가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알렉산더 레이턴은 주교제도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여 크게 파문을 일으켰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로벗은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말로 하지 않고 삶으로 하기로 결심하고, 에딘벅에서 공부하면서 경건한 생활을 힘썼습니다.
30세 때에 뉴배틀 지방 교회의 목사가 되어, 영국의 주교감독제와 스콧틀랜드 청교도들의 정교분리 원칙의 양대 전통 가운데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힘썼습니다.
청교도운동의 주축인 크롬웰의 동역자로서, 레이턴은 1652년 에딘벅 대학교의 총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하지만 교권정치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교회행정보다 영적 사역에 주력하면서, 교회를 영적으로 양육하기를 힘썼습니다.
특별히 성서주석, 성서강해설교에 주력하여 교회들로 하여금 성경탐구를 통한 영적 성장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경건한 목회자이기를 바랐으며, 그가 교회의 최고감독자인 대주교의 인상을 안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63세에 서둘러 대주교 직에서 사임하고, 경건한 생활로 말년을 보내다가 10년 후인 1684년, 자신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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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저희가 있는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하지만 저희의 실천력과 성과를 가지고 믿음이 완성되었다고 자만하는 일은 결코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