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굴레와 죄의 굴레를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성경전서 새번역)

{ 복음 } 마태복음서 9장 9-13절 …. [9]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10]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11]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12]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서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 *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6장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새번역’으로 이 절 전체를 여기에 적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의 형태로 보아 ‘불살라 바치는 제사’라는 뜻으로 ‘번제’(레 1:3이하)라고도 했고, 그 제사의 목적이 속죄나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해 바치는 제사라는 뜻으로 ‘속죄제’ 또는 ‘화목제’라고도 칭했습니다.

레위기의 제사 규정을 따라 속죄제와 화목제를 제 때에 하나님께 드리던 유다인들은 마음에 만족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제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에는 그들의 행위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예언자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즉 제사법에는 맞도록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제사를 받으실 하나님의 마음에는 흡족치 않으셨다는 뜻이었습니다.

왜냐구요? 하나님의 마음이 지금 무슨 일로 안타까우신지, 그들이 알아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이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염려가 그리도 크신데, 그들의 아픔에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들의 속죄제만 제사법규에 맞았다고 자만하고 있는 자들이 보기 싫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3절에는 결론적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13절 전반부는 ‘자비를 배우라’는 말씀이요, 후반부는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자비는 우리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구제의 삶을 연상케 하며, ‘죄인을 부른다’는 말씀은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구제와 복음전파가 모든 제사(예배)에 우선한다는 것이지요. 정작 예배는 구제와 복음전파를 향한 우리들의 발걸음을 떼기 전에 드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영어로 예배도 ‘service’ 라고 말하고 ‘구제와 복음전파’도 ‘service and mission’ 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며 애태우시는 것은, 가난의 굴레 속에 사는 사람들과, 죄의 굴레 속에 묶인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저희가 관심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임을 다시 깊이 통감합니다. 이 두 가지 일에 저희가 열심을 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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