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이 열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

<연중 17주일 본문, 준비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구약 } 창세기 18장 23-24, 26-32절 ….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물었다. “당신께서는 죄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24] 저 도시 안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 …. [26]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만 있으면, 그 죄없는 사람을 보아서라도 다 용서해줄 수 있다.” [27]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시 말했다.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아룁니다. [28] 죄없는 사람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시겠습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저 곳에 죄없는 사람이 사십오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사십 명밖에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여쭙자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사십 명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30] 아브라함이 또 여쭈었다.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삼십 명밖에 안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야훼께서 “삼십 명만 되어도 멸하지 않겠다.” 하고 대답하시자 [31] 그가 또다시 여쭈었다. “죄송하오나,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만일 이십 명밖에 안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이십 명만 되어도 그들을 보아서 멸하지 않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32] 아브라함이 다시 “주여, 노여워 마십시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열 사람밖에 안 되어도 되겠습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 = * 그러나 의인이 열 명도 안 되었었던지, 하느님께서 단호히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멸망시키고 마셨습니다.

오늘의 한국을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저 자신을 생각합니다.

과연 저 때문에 하느님께서 한국을, 또는 한국교회를 벌하실 것을 유예하고 계시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미안합니다만, 저는 그런 존재가 못됩니다.

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느님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는 불의하고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오늘도 하느님 앞에서 자원만 낭비하면서 머리 쳐들고 살고 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감히 주님 앞에 비옵니다. 우리 죄에 따른 엄한 벌과 심판을 내리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나라를 벌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느님의 분노를 가라앉히옵소서. 주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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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신 } 골로새서 2장 11-12, 14절 …. [11] 여러분은 세속적인 육체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형식이 아닌 진정한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 [14] 또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셨습니다.

* = * 할례가 무엇인가요? 신체의 일부를 잘라냄으로써, 죄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의 죗된 본성을 떼어냄으로, 불순종의 자식이 아니고 순종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기를 기원하는 예식입니다.

우리는 유대인 처럼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하여 순종의 자녀들이 되었다고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위의 본문 12절)

그런데 우리가 과연 죄의 본성을 떼어낸 사람들입니까? 말로만 떼어냈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은 속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의로운 편에 서겠느냐, 아니면 죄의 본성 쪽에 서겠느냐,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선택하라고 할 때에, 과연 저와 여러분이 평소, 홀로 있을 때, ‘하느님의 의’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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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루가복음서 11장 2-3절 ….. [2]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 *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짧은 기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 도 중요하게 여기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 받는 일도 중요히 여기셨습니다. 비중이 대등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의 자세는, ‘우리들의 죄의 문제’ 에는 비중을 두지 않고, 먹고 사는 데에만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만큼, 그 외아들을 평탄케 살지 못하게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끔찍한 죽음을 죽게 두실 만큼 참으신 것은, 우리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배반행위인 죄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 주 하느님, 이 부족한 사람이, 죄의 문제로 안타까와 했던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심각한 죄 중에 살면서도 마음은 태평했습니다. 그 죄를 해결해 주시려고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 <답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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