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사제의 기념일>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성시 } 시편 95편 1-7절 …. [1] 어서 와 야훼께 기쁜 노래 부르자, 우리 구원의 바위 앞에서 환성을 올리자. [2] 감사 노래 부르며 그 앞에 나아가자, 노랫가락에 맞추어 환성을 올리자. [3] 야훼는 높으신 하느님, 모든 신들을 거느리시는 높으신 임금님. [4] 깊고 깊은 땅 속도 그분 수중에, 높고 높은 산들도 그분의 것, [5] 바다도 그의 것, 그분이 만드신 것, 굳은 땅도 그분 손이 빚어내신 것, [6] 어서 와 허리 굽혀 경배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야훼께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 이끄시는 양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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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은 제롬 <또는 예로니모, 342(?) – 420), 영 – Jerome, 라 – Eusebius Hieronymus> 의 기념일입니다.
그는 달마티아(아드리안 해안 지방) 아퀼레이아의 스트리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정은 비교적 부유한 크리스천 가정이었으며, 부모의 배려 속에 그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로 유학하여, 8년간 신학수업을 한 후에야 세례를 받았으며, 이 때 그의 나이가 18세였습니다.
또한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배웠고, 당시의 학생들은 사회적 출세를 위해서 수사학이나 웅변술을 열심히 배우고 있었는데, 제롬은 이 분야에 누구보다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더구나 로마가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하던 도시였으므로, 제롬은 세속적 야심에 들떠서, 신앙생활마저 해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트리어(Trier)의 한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많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자성하면서, 당장 속된 야망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몰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심의 일환으로 구약성경의 원전어인 히브리어 공부에 매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374년, 즉 그가 32세 되던 해에, 그는 시리아 안디옥 지방의 사막지대로 들어가 거기 은거하고 있는 유대인 기독교도들과 더불어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들 랍비들에게 히브리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성경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후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사제 품을 받았지만 그는 성경연구를 위해서 학자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382년에, 교황 아마수스의 비서로 발탁되어 로마에 머물면서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마쳤습니다.
당시에는 로마에 여러 가지 성경 번역이 있어서, 권위있는 번역 하나를 교회가 정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던 터에, 제롬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에게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제롬은 이 제안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약 20년의 세월이 걸려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마쳤습니다.(404년) 그것이 그후 1천 년 동안 교회의 공인번역본으로 사용하고 있던 ‘불가타’(Vulgata) 라는 번역입니다. 후일 16세기 트렌트교회공의회는 이 번역을 정경으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제롬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성지 베들레헴에 자리를 잡고, 친구 파울라의 집을 빌려 그 곳에서 수도원을 시작하고, 지역 아동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를 병설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수도원은 조용하기만 한 수도원일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롬이 각종 신학논쟁에 휘말려, 거기까지 논쟁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또 논쟁의 쟁점이 무엇인지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ㄱ) 펠라기우스 논쟁 :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절망적 상태로 부패하지 않았다. 인간의 깊은 반성으로 그 원죄를 돌이킬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롬은 이 주장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반박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ㄴ) 오리겐 논쟁 : 오리겐(Origen, 185-254)은 “인간의 영혼은 태초부터 있었다. 모든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된다.(만인구원설)”고 주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제롬이 젊었을 적에 그의 저서에 심취했지만, 성경에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부인했습니다.
ㄷ) 여성 수도자의 자격 논쟁 : 당시의 일부 성직자들은, 제롬이 여성에게도 수도생활을 하게 하는 일, 여성에게도 성경연구를 하게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제롬은 여성도 사회적 논의과정과 교회적 논의과정에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ㄹ) 비기독교권과의 논쟁 : 유대교 지도자들과 성경해석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을 천명했습니다. (예 : 메시아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것) 또 철학적 합리주의로 성경을 공격하려는 자들의 의도를 분쇄했습니다.
ㅁ) 교회 내부인물과의 논쟁 : 금욕, 수도생활이 무가치하다는 의견을 제기하는 이들과의 논쟁, 등등.
무엇보다, 제롬은 성경주석서를 작성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의 권위를 확고히 세우는 일에 기여했던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라는 말을 늘 입에 담고 살았습니다.
제롬이 때로 거친 말로 신학논쟁을 했지만, 그것은 그가 그만큼 교회와 성경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 주 하느님, 저희에게 주신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다른 사람의 해설에 의존하기보다, 저희가 스스로 읽어서,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깊이 알아, 어제보다 오늘, 더욱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