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하늘에 기록되기를 바라라

<아씨시의 프란시스 기념일> …………………. (성경전서 새번역)

{ 복음 } 누가복음서 10장 17-20절 …. [17] 일흔<두> 사람이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1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19]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 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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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프란시스는, 1181년(또는 1182년)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아씨시에서 부유한 직물상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귀족 출신의 모나 피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세례명은 요한이었지만, 아버지가 프랑스와의 교역을 좋아했기 때문에 집에서는, ‘프란체스코’(작은 프랑스인)라고 불렀습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교육보다는 음악과 시, 젊은이들의 모임을 즐겼고, 사교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또래들 사이의 중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청년기에 그는 기사로서 명예를 얻고 싶어 했습니다. 아씨시와 베루지아(벨기에) 사이의 전쟁(1202)에 참전했지만 포로로 잡혀 1년간 수감되면서 병약해졌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삶을 전면적으로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풀려난 후에도 전투에 나서려 했지만, 꿈속에서 “너는 세속의 주인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후로 그는 점차 사치와 모험을 버리고 침묵과 기도를 중요시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심경의 변화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사건은, 길에서 나환자를 만나 혐오감을 극복하고 다가가 그를 포옹한 일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아씨시 근교의 작은 교회들, 특히 무너져 가던 ‘산 다미아노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내 집을 재건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의 귀로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실제로 교회당을 보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장사하는 포목을 팔아 교회보수공사 자금을 마련했지만, 이 일로 아버지와 갈등이 극심해졌습니다. 결국 그는 주교 앞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상속권포기 선언까지 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철저히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단순했습니다. 길가에서 설교하고,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과 복음을 믿을 것을 전했으며, 자신도 청빈과 노동으로 살았습니다. 차츰 그의 삶에 감동한 이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1209년, 그는 몇몇 동료와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알현했습니다. 그들이 너무 초라한 행색이어서 처음엔 만나기를 거절했지만, 만나고 보니 그들의 순수한 복음적 열정에 감동하여 교황은 설교권을 허락했습니다. 이것이 후일 ‘프란체스코회’(또는 ‘작은형제회’)의 효시였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글보다 생활의 모범을 강조했습니다. 수도회 규칙은 단순했고, 복음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1212년에는,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은 ‘클라라’라는 동향 출신의 젊은 여성이 수도자가 되려고 방문했습니다. 프란시스는 그녀를 위해 ‘가난의 자매회’(후일의 ‘클라라회’)를 설립했습니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새로운 수도자 삶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프란시스의 설교를 통해 회개하고 신앙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프란시스는 아씨시 안팎에서 설교자로, 또한 평화의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1219년, 이집트 아미에타로 직접 건너가 ‘술탄’(제왕) 알-카밀을 만나 종전협정을 제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편, 프란시스수도회는 스페인, 이집트, 그리스, 헝가리 등 유럽과 아프리카 일대로 퍼져 나가 1219년 총회 시에는 회원이 5천 명 가량 되었습니다.

1220년에 그의 건강이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리한 금식과 과로로 쇠약해졌고, 눈병과 여러 질환으로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1224년에 라베르나 산에서 기도생활을 하는 도중에 그의 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오상‘(두 손, 두 발, 옆구리의 상처)을 똑 닮은 상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끝내 육체의 쇠약을 이기지 못하고, 1226년 10월 3일 밤, 아씨시 근교 포르치운콜라의 작은 초막에서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4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프란시스는 성령 안에 살며,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만 집중한 이로서, 그의 이름이 하늘에 뚜렷하게 기록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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