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을 베풀어야 하나님의 사람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 구약 } 요나 4장 9-11절 ….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다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 * 어제에 이어서 우리는 요나서를 생각합니다. 죄 많은 도시 니느웨 사람들의 전면적인 멸망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께서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요나는 오히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 받는 모양을 바라보며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못된 태도를 타이르십니다. ‘내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나의 징계의 채찍을 거둔 것이 왜 너에게는 그렇게도 화가 날 일이냐? 나는 긍휼을 베푸는 여호와다. 너도 긍휼의 사람이 되거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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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시 } 시편 86편 15-16a절 …. [15]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16a]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 * 성공회 기도서를 작성한 영국의 크랜머 주교는 평소, 영어 단어 가운데서 ‘mercy’라는 단어만큼 사랑스러운 단어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mercy’는 한글로 번역할 때에 ‘긍휼’ 또는 ‘자비’라고 번역합니다. 순수 한글로는 ‘불쌍히 여김’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한자로 ‘자비’라는 단어는 불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어휘인데, 이것은 다분히 경제적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이 강조되며, ‘긍휼’이라는 말은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를 받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mercy를 개역성경에서는 ‘긍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에서는 이를 ‘자비’로 번역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기독교적인 의미가 희석된 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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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누가복음 11장 1-4절 ….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 = * 누가복음이 전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이 전하는 주기도문과는 다소의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마태복음이 전하는 주기도문을 공기도나 개인기도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기도의 내용으로 보면 네 가지 기원문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이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되도록 저희가 힘써야 합니다. 2) 저희에게 베푸신 <의식주는 인류공동체가 함께 나누어서> 핍절한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3) 저희들이 저희에게 잘못을 범한 이들을 모두 용서하며 살겠습니다. 4) 사탄의 유혹을 철저히 거절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보면, 기원문이라기보다, 기도자 자신의 삶의 자세를 올바로 가지기로 다짐하는 <선언문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는 하나님께서 이행하실 요소보다, 인간이 이루어야 할 요소가 짙은 기도인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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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교회가 오늘 기념하는 믿음의 선배 >> 알렉산더 포브즈(Alexander Penrose Forbes, 영국 브레친교구 주교, 1817 – 1875) :

알렉산더 포브즈는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옥스포드에서 공부하면서 신학과 고전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성공회의 예전을 회복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소책자교육운동(‘옥스포드운동’)에 힘쓰다가, 1847년에 브레친교구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의 신학은 ‘성육신 중심’이었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신앙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가난한 노동자, 광부, 여성, 아동의 교육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모든 사회 계층의 평등함을 주장했고, 교회가 ‘긍휼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포브즈의 어록집에 “경건이 없는 긍휼은 공허하고, 긍휼함이 없는 경건은 잔인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진실로 ‘긍휼과 경건이 결합된 인격’을 지닌 지도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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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힘입어 오늘도 살고 있는 저희가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시며, 이로써 저희의 경건한 신앙생활이 온전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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