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복음 } 루카복음서 14장 12-14절 …. [12] 예수께서 자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당신이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대접할 때, 당신의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시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당신을 초대하여 당신이 보답을 받게 됩니다. [13] 당신이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절름발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시오. [14] 그들이 당신에게 보답할 수 없으니 당신은 행복할 것이오. 의인들이 부활할 때 그들이 보답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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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계교회가 기념하는 믿음의 선배들 가운데 네 분을 소개하려 합니다.
( 1 ) 위니프레드(Winifred) : 주후 7세기에 영국 웨일스 지방 여자 수도원장으로 살다간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고, 수도생활에 헌신하려는 뜻이 강렬했습니다. 그의 영적 스승은, 웨일스와 아일랜드 선교에 공헌한 베오노(Beuno)라는 분이었습니다.
한 영주의 아들인 Caradog 이라는 못된 청년이 수도자인 위니프레드에게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끝까지 위니프레드가 거절하자 그녀의 머리를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베오노가 이 사실을 알고 달려와서, 그녀의 시신 앞에서 기도를 올리자, 위니프레드의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그후 그녀는 수도원장으로 공동체를 이끌며,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강제적 결혼풍습을 타파하는 일에 기여했다고 하며,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수도원에서 돌보며, 여성들에게도 가정 속에서 수도자 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서를 만들고 이를 제도화했다고 합니다.
( 2 ) 말라키(Malachy, ? – 1148) : 그는 11세기 아일랜드교회를 혁신하고 교회체제를 확고히 세운 주교였습니다. 말라키는 북부아일랜드 태생이었습니다. 성품이 경건하고 온화하며 헌신적이었습니다.
당시에 성직자들이 성직을 멋대로 세습하는 습관이 있어서, 이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리하여 Downe 교구의 주교가 되었고, 그후 Armagh 관구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성사의 전례를 규격화하고, 교회일치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 3 ) 리챠드 후커(Richard Hooker, 1554 – 1600) : 후커는 교회개혁이 거의 정착되어 가던 16세기 후반에 살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서서, 신앙의 기본적 요소를 제외하고는 중용을 지키도록 권유하는 신학적 모색을 했던 분입니다.
가령 예전적인 차이를 가지고 다른 교회를 이단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그는 어디까지나 영국교회가 ‘Via Media’ (middle way)에 서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는 사제로서, 런던과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일생 사역을 하면서, 목회현장에서 청교도를 우호적인 관점에서 보는 이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목회적 경험을 토대로 ‘중용’ 이라는 신학적 원칙을 교회에 심었던 것입니다.
즉 신앙의 토대는 성경이며, 이 원칙에서는 누구든 벗어날 수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도 충돌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전통에 해당하는 요소들은, 일치를 위하여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신학적 이러한 입장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국교회의 초석이 되고 있습니다.
( 4 ) 마르틴 데 포레스(Martin de Porres, 1579 – 1639) : 마르틴은 남아메리카 페루의 한 ‘평수사’ 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계 귀족이었고, 어머니는 흑인노예 출신으로 자유인이었습니다. 남미에는 이런 혼혈족(일명 ‘메스티소’)이 많아서, 17세기에는 이 혼혈족들이 몹시 차별을 받았습니다.
마르틴은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바랐지만, 혼혈 출신이었으므로, 정규의 수도자나 성직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틴은 어려서부터 병약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노예로 팔려온 사람들의 고통을 익숙히 보아왔고, 그들을 돌보며 자랐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의 조수’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백인수도자들에게 ‘겸손, 기도생활, 온유, 사랑의 삶’의 모본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수도원은 그를 정규 수도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마르틴은 1) 수도원 경내에서 병자진료소를 운영했고, 2) 노예, 버려진 아이들, 노숙자, 약자들을 돌보았고, 3) 스페인 출신 수도자와 페루 출신 수도자 간의 알력을 해소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틴의 영성의 특징은, 깊은 사랑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입의 말보다 행동으로 복음을 보여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양한 처지의 사람들을 접하면서, 원인 모를 열병을 일으켜,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6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자비의 사람’, ‘빈자들의 아버지’ 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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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예수님, 저희가 저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