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신비 vs 신비주의 신앙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만도 2과 } 마태오 복음서 17장 22-23절 … [22]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머지않아 사람들에게 잡혀 [23]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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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 )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이치는 모두가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 그 하느님의 외아들이 바로 나사렛에서 자라난 청년 예수시라는 것, 그가 로마 총독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해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가 사해졌다는 것, 그가 죽은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그후 40여일 후에 승천하셨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신비입니다. 합리론 밖에 있습니다. 초월적인 논리인 것이지요.

그 밖에도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난치병들을 치유하신 일, 심지어 죽었던 사람들을 살리신 일, 몇 명의 제자들 앞에서 천사백 년 전에 죽은 모세와 팔백 년 전에 승천한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신 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 물 위를 걸으신 일, 보리떡 다섯 개와 구운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 이 모든 일들도 신비입니다. 물상계를 떠난 이야기들입니다.

우리들은 이 신비로운 메시아(구세주)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그 신비로운 구원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신자’(믿는 사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2 ) 그런데 ‘신비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어떤 사람들을 일컬어 ‘신비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려는 열정’으로 초월적 체험에 몰입하면서 그들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 분들 중 몇 사람 여기에 소개합니다.

가) 힐데가르트 폰 빙엔 (Hildegard von Bingen, 1098 – 1179) :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환시를 보고 그 경험을 기록(대표작:‘하느님의 길을 알라’)으로 남겼습니다. 그녀는 교회의 타락을 꾸짖었고, “마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뵙기를” 권고했습니다.

특별히 그녀가 보았던 환시들은 현실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중심 주제로 했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거절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환시가 교회로부터 ‘개인적 조작’으로 취급 당하더라도, 교회가 그 기록을 보아 주는 것 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평생 서원수도자로 살았으며, 다양한 재능(신비가, 신학자, 작곡가, 시인, 의학자, 자연과학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건설한 에빙겐수도원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 – 1328) : 그는 ‘하느님 안에서 내적 자유를 얻음’에 대해서 평생 사색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느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영혼의 중심에 계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을 비움(놓아버림)으로써 하느님과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사상(‘영혼의 신적 탄생’ 또는 ‘무(없음) 속의 하느님’)은 당시 교회가 보기에 ‘너무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단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재판을 거부하지 않았고, 판결이 있기 전에 그가 별세했지만, 교회는 그의 입장을 “심오하지마는, 조심스러운 해석이 필요한 전통적 신비주의”였다고 판결했습니다.

다) 요한 오브 더 크로스 (John of the Cross, 1542 – 1591) :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개혁과 특별히 까르멜 수도회의 개혁 과정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까르멜 수도자들에게 폭력적으로 감금을 당해 매주 채찍질을 당했고, 불이 없는 감방에서 철저한 격리를 당했습니다.

그는 그 고통의 경험들을 통해서 ‘어두운 밤’의 신비를 체험했다고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물상적 빛보다 더 밝은 빛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교회로부터 당하는 고난이 ‘교회의 개혁 과정에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참고, 수긍한다고 말했습니다.

49세로 임종하던 때에, 그는 “나는 오늘 밤 내 사랑(하느님)을 만나러 간다”고 말했습니다.

라) 야곱 뵈메 (Jacob Boeme, 1575 – 1624) : 희랍 철학, 특별히 플라톤의 철학을 동원하여 기독교를 설명하려던 그의 저서가 정통파를 자처하는 교회들에 의해서 금서조치를 받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무슨 방법으로든 하느님을 알도록 설명하려는 노력은 필요한 것이다’고 했지만, 그의 생전에는 그의 생각을 인정하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의 사후에, 개신교의 영성 연구자들에 의해서 ‘신비주의적 해석이 남다른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마) 막데부르크의 메흐틸트 (Mechtild of Magdeburg, 1210 – 1280) : 중세 신비주의의 여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시처럼 흘려 보낸 영혼으로 평가합니다. 어려서부터 독일 작센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기도와 영적 직관에 민감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열두 살 무렵,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고, 이 경험이 평생을 이어갔습니다.

스무 살 무렵에 ‘베귀네’라는 여성 공동체에 합류하여, 1) 결혼을 안 하고, 2) 수도 서약은 없어도, 공동체적 삶과 봉사, 그리고 영성을 추구하며 일생을 보내는 공동체로 발전시켰습니다.

메흐틸트는 깊은 기도 중에, 하느님의 사랑을 ‘불’과 ‘빛’으로 경험하고, 자신의 영혼과 하느님의 만남을 ‘춤’과 ‘향기’로 경험하고, 특별히 현실 교회의 부패상과 성직자들의 타락을 예언적으로 규탄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심지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대표작 <하느님의 흐르는 빛>은 하느님을 ‘연인’으로 묘사하는 신비문학입니다. 그녀는 이 저서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불처럼 흐르고, 그 사랑에 적시는 영혼은 새롭게 태어난다.” 고 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을 표현할 때, ‘빛’, ‘흐름’, ‘포옹’, ‘춤’, ‘향기’라는 언어를 동원했습니다.

이 책 속에서 그녀는 가난하고 억압 받는 이들을 향한 그의 애끓는 연민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노년에 접어들며, 교회로부터 비난과 박해가 심해지자, 그녀는 헬펜슈타인의 한 수도원으로 피신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1280년 오늘(11월 19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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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느님, 저희의 하느님 사랑이 천차만별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저희 마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을 모두 아십니다. 저희의 언어가 부족하면 저희의 삶과 행동으로 드리는 예배들도 모두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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