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바라나, 평화의 길 외면..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복음 } 루카 복음서 19장 41-44절 …. [4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42] “오늘 여러분이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여러분 눈에는 그것이 가려져 있소. [43] 그러나 일을 겪을 날이 여러분에게 닥쳐올 것이오. 그러면 여러분의 원수들이 여러분 둘레에 공격축대를 쌓은 다음, 여러분을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오. [44] 그리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바닥과 담벼락에 내던지고, 그대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실 때를 여러분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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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왜 우셨을까요? ‘왜 부활과 영생을 믿지 못할까?’ 안타까워하시며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던 일이 있습니다.(요 11:35) 대속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큰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드리셨다고도 했습니다.(히 5:7)

그리고 또 한 번의 우신 기록이, 장차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내다보시면서 ‘그렇게 가르쳐 주어도, 왜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가!’ 안타까워하시면서 우셨습니다.(눅 19:41)

예수님께서 ‘평화의 길’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종합적으로 평화의 길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 자신이 평화의 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담으로 인류와의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을 무너뜨리시고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때에, 십자가를 지심으로 ‘화해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평화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철저히 예수님을 배격했습니다. 심지어 ‘평화의 왕’(이사야 9:6)이신 예수님을 죄인 중의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달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사랑이 평화의 길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하셨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으며, ‘지극히 작은 자’를 오히려 더 사랑하라 하셨고,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데, 서로 시비하고 다툴 일이 왜 생기겠습니까?

셋째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모든 전쟁을 폐하는 길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힘이 아닌 섬김으로’ 통치하는 것이, ‘칼이 아닌 십자가를 짐으로’ 통치하는 것이, ‘보복이 아닌 용서로’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셨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 교훈만 받아들였더라도, 2천 년 전 예루살렘에만 평화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평화가 올 뻔했습니다.

21세기는 진실로 평화보다 전쟁의 기세가 인류를 위협하는 시대가되었습니다. 핵무기를 만지작거리는 나라들이 한 두 나라입니까? 러시아가 그렇고, 미국이 그렇고, 중국이, 북한이 그렇습니다.

누구 한 사람이 자칫 실수를 하는 날에는 온 세계가 전쟁의 도가니로빠져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안에 우리 인류를 위하여, 최대의 기적인 행성으로 지어 주신 이 아름다운 지구를, 잿더미, 시체더미로 만들어놓은 채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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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오늘부터라도, 저희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저희의 삶 속에서 성령님과 더불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평화의 길을 선택하며 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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