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구약 } 이사야서 11장 1-3상, 6-10절 …. [1]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성령, 곧 지혜와 슬기의 성령, 경륜과 용맹의 성령, 지식의 성령이 내리시리니, [3] 그는 주님을 경외하며 기뻐하리라. …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사악하거나 패덕하게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이새의 뿌리가 이방 민족의 깃발이 되어 그 백성이 그에게 모이고 그의 거처가 영광스럽게 되리라.
* = * ( 1 )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아 예언이 이사야서 7장부터 시작되는데, 메시아가 다윗왕조의 족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과 그는 평화의 임금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마치 교향곡의 첫 악장처럼 전개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또는 ‘이새의 뿌리에서’ 라는 표현을 메시아의 족보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다윗왕의 아버지의 이름이 ‘이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새의 후손’들이 줄줄이 다윗왕조의 왕들이 되었지만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보듯이 그 왕들의 족보가 ‘칭송받을 만한 족보가 아닌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배반한 왕들이 많았습니까? 이방 나라들의 신들을 들여다가 그들의 신전을 지었고, 왕의 지위에 있는 그들이 그 신전에 들락거리며 우상을 섬겼던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왜 그런 비뚤어진 계보에서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약속하신 바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고, 약속한 바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의심없이 알아보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 2 ) 6-8절의 ‘꿈 같은 평화의 비전’은 읽을 때마다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늑대와 양, 표범과 염소, 송아지와 사자, 어린아이와 맹수가 사이좋게 함께 뛰놀며, 독사의 굴 위에서 아이가 딩굴어도, 젖먹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집어넣어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 광경입니까?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약한 놈은 강한 자의 밥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그리스도)께서 이 법칙을 뒤엎어버리고 맙니다. 서로는 평화롭게 지냅니다. 서로 해치지 않고, 서로를 위해서 걱정해 주고 보살펴 줍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새로운 질서이고, 메시아가 통치하는 기본법(‘사랑의 계명’)입니다.
진정 이 기적 같은 평화를 실현하시러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칭한 호칭의 하나가 ‘평화의 왕’ 이었습니다.(이사야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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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루카 복음서 10장 21-24절 …. [21] 그때 예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무리와 슬기롭다는 무리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량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말고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아들과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말고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23]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여러분의 눈에 띄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24]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노니, 많은 예언자와 왕이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했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 = * 이기심과 세속적인 가치관에만 눈이 뜨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일러 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하늘 나라의 질서를 말해 주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습니다. 다만 어린 아이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제자들만이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지나간 세월 동안 많은 예언자들과 임금들이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을 보고 싶어했으나 보지 못했고, 여러분이 듣고 있는 것(* 하늘 나라 복음)을 듣고 싶어했지만 듣지 못했음을 한탄했지 않느냐’ 고 하시며, 예수님 앞에 다가갔던 무리들을 나무라셨습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뵙고, 예수님의 많은 말씀들을 듣고 있는 우리들은, 그런 질책을 안 들을 만큼 믿음의 사람들입니까? 저는 그렇지 못해서 꾸중을 들어도 마땅한 사람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조금씩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귀로 하늘 나라 복음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 나라의 법, 곧 사랑의 계율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싸움 많은 이 세상이 평화의 동산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