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 속에 예수님 호칭이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구약 } 이사야 7장 10-14절 ….. [10] 야훼께서 아하즈에게 다시 이르셨다. [11]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께 징조를 보여달라고 청하여라. 지하 깊은 데서나 저 위 높은 데서 오는 징조를 보여달라고 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는 징조를 요구하여 야훼를 시험해 보지는 않겠습니다.”

[13]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14]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 * ( 1 )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 예수님의 이름이 성경에 백 가지가 넘게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는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임마누엘’로서 바로 오늘의 본문 14절에 있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호칭들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그들의 체험적 신앙을 고백문으로 작성할 때에 불러 올렸던 것입니다.

‘임마누엘’ 에는 어떤 신앙고백이 담겨 있을까요? 히브리어로 ‘임’은 ‘with(~와 함께)’ 라는 전치사고, ‘누’는 인칭대명사로 ‘us(우리와)’ 라는 뜻이며, ‘엘’은 ‘God(하느님)’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를 모두 합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이 됩니다. 즉,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심을 우리가 알게 된다” 는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호칭입니까? 그러나 이 호칭은 이사야 7:14(마 1:23에서는 이를 인용)에서만 단 한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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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시 } 시편 24편 7-10절 …. [7]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야훼이시다. 싸움터에서 그 용맹 떨치신 야훼이시다. [9]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영광의 왕>은 만군의 야훼 그분이시다. (셀라)

* = * ( 2 ) 신앙고백으로서의 하느님 호칭 하나가 ‘영광의 왕’(히, ‘멜레크 학카보오드’)입니다. 오늘의 시편에서는 마치 성문에서 성문지기와 입성하시는 ‘언약궤’의 하느님과의 문답 형식으로, 하느님의 신분을 밝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전쟁에서는 강하고 능하신 왕이시고, 백전백승하시는 대왕 하느님이심을 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언약궤를 앞세우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백성들이 함께 하느님을 칭송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듯 보입니다.

참고로, 성문을 향해 ‘머리를 들라’고 한 표현은, 구조상 육중한 성문을 밧줄을 묶어 기계장치로 아래서부터 위로 쳐드는 형태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열라’가 아니라 ‘머리를 들라’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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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루가 복음서 1장 28-33절 …. [28]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29]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그러자 천사는다시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31]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33]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 하고 일러주었다.

* = * ( 3 ) 이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호칭 한 가지가 실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본문 32절) 이라는 호칭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뜻이 하나이고, 행동에서 하나입니다.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습니다.(요 4:34, 7:28, 8:42, 10:38, 14:10)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기고, 아들과 자신의 권세를 공유합니다.(요 3:25, 5:22, 36)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사람의 아들’(‘메시아’를 뜻함, 다니엘 7:14)이라는 호칭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보다 자주 애용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려왔던 음성이 예수님을 칭하기를 “내 사랑하는 아들”(또는 “하느님의 아들”) 이라고 명기한 곳들이 있습니다.(막 1:11, 눅 1:35)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했을 때에 예수님은 이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마 16:16)

( 4 ) 여러분의 신앙고백에서 예수님(또는 하느님)의 호칭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호칭으로 불러 드리는 것은 교회가 당연한 일로 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아무렇게나 호칭을 바치는 것은 삼가는 것이 교회의 미덕입니다.

가령, 제가 공부하던 신학교의 교수 한 분은 기도 서두에 반드시 ‘엄위로신 하나님’이라고 했고, 제가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은 대표기도에서 하느님을 향해 ‘아버지’라는 호칭만 사용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피난민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 한 분은 ‘예수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여, 우리가 많이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이분들이 모두 성경적 호칭에서 아주 떠난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최근 이, 삼일간 저는 저 나름의 하느님 호칭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았는데,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하느님께 별로 친근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나중에 하느님을 친히 뵈올 때, 평소 저 나름의 하느님 호칭이 있어서, 그 호칭으로 불러 올리게 된다면, 오히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까 상상합니다.

<기도> 주 하느님, 저희의 신앙고백이 저희의 언어로 하느님을 불러 올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가장 친근한 호칭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구주, 나의 주님’ 으로 고백하며 살 수 있도록 저희를 축복하시고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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