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국가권력 간의 갈등

<토마스 대주교 기념일,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성시 } 시편 2편 1-12절 …. [1] 어찌하여 민족이 술렁이며 백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주님을 거스르고, 그분이 기름 부으신 이에 대적하여 세상의 왕이 일어나며 군주가 함께 음모를 꾸미누나. [3] 그들이 이렇게 말한다. “저들의 오랏줄을 끊어 버리고 저들의 사슬을 벗어 던져 버리자.” [4] 하늘에 좌정하신 분께서 웃으시도다.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더니 [5] 마침내 진노하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분노하시어 그들을 놀라게 하시리라. [6]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가 나의 왕을 세웠노라!” [7] 내가 주님의 결정을 선포하리라.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8] 나에게 간청해라. 내가 이방 민족을 너의 재산으로 주고, 땅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9] 너는 그들을 쇠 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그릇처럼 부수리라.” [10] 이제. 왕들은 깨달아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징계를 받아들여라. [11]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떨며, [12] 그 아들에 입 맞추어라. 그러지 않으면 그분께서 진노하시어 너희가 도중에 멸망하리니, 그분의 진노가 타오르기 때문이다. 그분께 의지하는 이 모두에게 복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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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 ) 토마스 대주교(1118 – 1170)는, T. S. 엘리옷의 ‘대성당의 살인’ 이라는 희곡의 주인공 ‘토마스 베케트’로 익히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의 부모는 노만 족으로, 가정형편은 넉넉했습니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후, 24세에 켄터베리 대주교 데오발드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대주교는 그를 총애하였고, 그에게 행정능력과 외교의 재능이 있는 것을 보고, 교회법을 공부시키기 위해 유학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37세에 그는 영국왕 헨리 2세의 눈에 들어 궁중자문역에 임명되었고, 왕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7년간 의회의원으로, 또 외교관과 군인과 교회재판의 배심원 등의 역할로 교회와 국가를 충성스럽게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162년 그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고 나서부터는 왕과의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껏 헨리 2세의 심복이었던 그는 궁정출입을 일체 끊고, 자선사업과 금욕생활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국왕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마침, 한 사법권 논쟁이 일게 되었는데, 성직자가 피고인이 된 경우 교회와 국가 간에 어느 쪽에 법적 권위가 더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의견이 갈라져, 궁정을 중심으로 일대 돌풍이 일고 있었습니다. 화근을 두려워하여 토마스 대주교는 1164년에 프랑스로 피신하였습니다.

장장 6년이 지나, 국왕과 대주교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1170년 12월 1일 대주교는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임금은 자기의 심복인 주교 몇 사람을 토마스 대주교에게 보내어, 과거 출교처분을 받은 몇 사람에 대해 출교처분을 취소하고 복권시켜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베케트는, 아무리 국왕이라 할지라도 교회의 권위에 간섭하거나 사주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국왕은 도버해협을 건너 노르만디 지방을 여행하던 중에, 대주교에게 자기 요청이 거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해서, 분별없는 욕설을 사람들이 듣는 앞에서 마구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충성스런 기사 네 사람은, 분명히 이것은 국왕이 대주교의 암살을 바라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즉시로 도버해협을 건너가 12월 29일 대주교 관저로 쳐들어갔습니다. 대주교는 다급한 나머지 대성당 안으로 몸을 피했지만, 대성당 안으로 쫓아들어온 기사들의 칼날에 잔혹하게 난자당하여 목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이 곧 유럽 일대에 퍼지면서 모든 교회들이 토마스 베케트의 죽음을 ‘순교’로 공포하였습니다.

( 2 ) 역사 속에서 교회 당국자와 왕권이 조화스럽게 각자의 소임을 다하는 일도 있지만, 아주 극렬하게 대립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치와 교회의 권위는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만, 교회에 모이는 회중이나 성직자도 한 국가에 속한 국민이므로, 간혹 교회가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 설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악한 정부를 두호하는 교회는 타락한 교회라는 점에서 ‘정교 분리’ 의 원칙이 마땅하지만, 정의롭고 백성의 뜻을 따르는 정부에 비협조적인 자세로 맞서는 교회도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적 권위를 일반화시킨다면, 그것은 교회의 권위라고 볼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것, 특별히 사회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 교회의 권위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부모의 권위가, 가족을 위하여 모든 수고, 심지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랑에 근거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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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저희 한국교회가 진실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사회 정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사랑의 실천이 교회의 권위의 근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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