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복음 } 루가 복음서 4장 16-21, 28-29절 ….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18]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셨다.… [28]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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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공관복음(마태오, 마르코, 루가)인 세 복음서가 구세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달랐다고 보는 이들도 많이 있지만, 그 다른 시각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모습을 편파적으로 보지 않고, 더 실제 모습에 가깝게 보도록 여러 각도에서 노력했던 결과였다고 교회는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던 무렵의 예수님의 모습을 공관복음서들이 각각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마태오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공통된 부분들을 생략하고 나면, 공생애 초입에서 산상보훈을 비롯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5장 서두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시작하는 팔복이 선언됩니다. 하느님의 나라 백성이 될 자격에 관한 해설입니다. 임금으로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엄한 모습을 그리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많은 기적과 기사>를 보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수없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심지어 불치의 병인 나병환자, 중풍병자들을 고치십니다. 말씀 한 마디로 갈릴리 호수의 격랑하는 물결과 바람을 멈추셨습니다. 귀신을 몰아내시며, 물 위를 걸으셨고, 수 천 명의 사람들을 떡 몇 덩어리로 모두 먹이십니다. 그렇게 초인적인 메시아를 소개합니다.
이 두 가지 복음서에 비해서, 루가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함과 동시에 고향 동네에서부터 <위협을 받으시는 수난의 메시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사야의 예언 곧 희년선포 부분을 낭독하신 뒤, 이 예언이 “너희들” 곧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곧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임금 또는 메시아로 오셨다는 말도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자렛 고향사람들이 ‘이것은 반란이 아닌가’ 하며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고, 현 권력자인 로마 총독이나 헤롯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곧 동네가 진노의 칼날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화를 당하기 전에, ‘저 반란의 말을 한 자를 우리가 먼저 처단하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것입니다.
가까스로 예수님께서는 고향 땅에서 애꿎은 죽음을 면하기는 하셨지만,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이 황당한 곤욕을 치루는 장면으로부터 골고다 언덕에서 최고형을 받은 죄수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의 공생애는 전혀 순탄치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독서를 하루에 한 장 씩, 또는 한 단락 정도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라도 성경을 읽는 것이 전혀 읽지 않는 것 보다는 낫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본래 그렇게 읽으라고 쓰여진 책이 아니라, 한 권씩 통독하기를 바라서 쓰여진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한 권 씩, 말하자면, 마태오복음 또는 로마서 전체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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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느님,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임하시기를 안타까이 기다렸다던 유대인들이, 주님께서 친히 임하시고, 메시아임을 드러내셨을 때에,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사실을 읽고서,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21세기에 사는 저희들마저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현존하심과 역사하심을 가리우려는 우를 범하지 말게 하옵시고, 기쁜 마음으로 날마다 주님을 섬기며 함께 동거하게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