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모르면, 모든 지식이 헛 것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신약전서 개역개정판)

{ 복음 } 마가복음 2장 1-12절 ….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 로고스)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 roof)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 매트리스)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 child)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 authority)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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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 ) 저는 한글 성경 가운데 가장 자주 사용하는 번역이 ‘새번역’이나 ‘공동번역 개정판’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개역개정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의 본문 가운데 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 메워 가지고 예수에게 올새” 가 좋아서입니다.

앞의 두 번역(새.., 공..)에서는 ‘사람들이’를 뺐습니다. 물론 희랍어 원문에 ‘사람들이’라는 단어가 따로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동사, ‘오다’의 격변화가 3인칭 복수인데, 영어로 말한다면 “They came”입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그분(*예수님)에게 왔다’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를 왜 뺐느냐는 것이 저의 관심입니다. 5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했는데, 이것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도 되고, 특별히 그들의 도움을 빌어서 예수님 앞에까지 다다른 <중풍병자의 믿음>일 수도 있겠지만, 문장에서 가려져 있는 <사람들>이 믿음의 주체였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에 몇 사람은 메고 온 네 사람 중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몸이 약해서 메고 오는 수고는 못할지언정, 마음으로 간절하게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까지만이라도 일단 데려가면,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겠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날, 놀라운 주님의 역사가 있게 한 주동자들이 바로, 문장 속에서는 다만 동사의 격변화 정도로 밖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그 수를 알 수 없는 몇 사람의 믿는 마음들이 뭉쳐져서, 이 일이 있게 했던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름이 역사에 남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일에서 뒤빼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뭉쳐야,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 2 ) 두번째의 저의 관심은, 서기관들의 헛된 지식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본문 7절 하반절) 이 말은 정말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감히 인간의 죄를 사하겠습니까?

그런데 눈앞에 계신 분이 ‘죄를 사하시는 것을 보니, 이 분이 신적 존재이신가?’ 를 생각했어야지요? 그런데 자기들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고, 같은 언어를 쓰고 계시다고, ‘혹시라도 이 분이 하나님이신가’라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못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천, 만 가지 지식을 가졌던들,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습니까?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 말하는 동안에, ‘야, 이분이 하나님이시구나!’ 깨달았어야지요?

그 서기관들이 용케도 그 비좁은 자리에까지 비집고 들어와 앉아, 구세주 예수님께서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시던 때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냔 겁니다.

한 마디라도 ‘저 말씀은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라고 느끼고 귀를 쫑긋하고 바로 들었으면, 그들이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수없는 날 동안 설교자 앞에 앉아서 강론을 듣고 있으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지 못했다면, 그것은 누구 탓일까요?

( 3 ) 그 날의 회중 속에서 <나 찾기> 게임을 해 보십시다. 만약 가버나움의 지붕이 뜯겨졌던 그 집(*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에는 대체로 시몬 베드로의 집에 머무셨을 가능성이 큽니다)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과연 누구였을까를 생각해 보는 문제입니다.

~()~ 중풍병환자였습니까? 아쉬운 점을 풀어 보려고 예수님 앞에 찾아왔던 사람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주시기를 바라시는데도, 내 병만 낫게 되었으면, 볼 일 다 보았다고 그냥 사라지는 자가 아니냔 말입니다.

~()~ 환자를 데려온 사람들은 아니었습니까? 인간을 향해 예수님께서 베풀고 싶었던 것은 ‘죄 사함’ 이었는데, ‘내가 교회에 데려 왔으니, 인도한 나도, 인도받은 저 사람도, 할 일은 다 했다’ 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닌가요?

~()~ 말씀을 트집 잡고 있었던 서기관들이 바로 나의 모습은 아닌가요? <설교를 위한 본문 주석> 과목을 신대원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저로서는, 주일에 설교자의 강론이 바로 들리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그들의 설교를 혼자 품평하기가 일쑤입니다. 아, 하나님, 저를 이 악습의 묶임에서 풀어 주시옵소서.

~()~ 말씀을 경청하고 믿고 구원에 이른 무리들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십니까? 그러면, 진실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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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저희가 천, 만 가지 지식을 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도록 복 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세상 사는 것이 모두 헛된 일인 줄을 먼저 알게 하옵소서. 진리의 성령님이시여, 저희를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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