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로의 회심’ 기념일> ………… (신복룡 신구약전서)
{ 구약 차용 } 사도행전 22장 2-16절 …. [2] … 바울로가 계속 말했다. [3]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나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녀를 가리지 않고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5] 제사장과 모든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는고?” [8] 내가 여쭈었습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그대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요.” [9]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이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10] 그래서 제가 여쭈었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오. 장차 그대가 행하게 될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그대에게 일러 줄 것이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아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사울 형제여, 눈을 뜨시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때 아나니아스가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은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은,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오. [16]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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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 ) 바울로는 율법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충성하는 정도가 보통 유대인의 수준을 넘어, 어떤 유대인들이 나자렛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고 있는 데 대해서, 그들을 ‘율법을 모독하는 무리’ 라고 단정하고,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으로 확신하고, 이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행 9:1-2)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었고, 즉시로 주님의 사람이 되어, 다마스쿠스로 들어가 아나니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 곧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박해를 당할 대상으로 변했던 것입니다.(행 9:18, 20)
하지만 그는 다른 사도들에게서 사도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은 듯합니다. 그의 편지들을 보면, 스스로 사도임을 주장하는 내용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갈 1:1, 고후 11:5)
열두 제자들의 사도적 기준(행 1:22)에 의거하면, 바울로는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도 아니었고, 예수님께 친히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객관적인 증거도 없으므로, 사도의 카테고리 안에 들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전파의 물량적 내용으로 보면 다른 사도들 못지 않은 대사도였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다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 라는 복음의 핵심 주제를 논증함에 있어 바울로가 남다른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2 ) ‘율법이 아니고 믿음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논증을 그의 편지에서 찾아봅니다:
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선조’라고 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유대인에게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전해지기 450 여년 전에 살았던 사람으로, 율법에 의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었고, 그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하셨습니다.(갈 3:7-9)
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애는 쓰면서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방법은 따르지 않았습니다.(롬 10: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나 차별없이 구원하시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롬 11:25-32)
다) 율법주의자였던 사울의 견지에서는, 예수는 ‘저주 받았던 실패자’(신 21:23) 였기 때문에, 자신의 적으로 볼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행 9:4) 그러한 그가 아나니아스를 만난 이래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적으로 보게 만드는 율법의 모순을 깨닫게 됩니다.(롬 3:20, 5:20)
( 3 ) 믿음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인격적 신뢰’가 믿음인데, 그것은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롬 10:10)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신뢰하여’ 그분께 자신을 맡기고, 그 신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라 함은, 감정 만이 아니라, 인격의 중심, 곧 ‘의지-결단-전 존재의 방향’을 말합니다.
마음에 품은 뜻이 몸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우리 인생이듯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뜻을 몸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은 행동으로 보이는 율법을 다시 중요시하려는 말이 아니고, <마음>이 몸으로 사는 삶의 주인이 되는 현상의 중요성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한 두 차례는 성공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나약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인내가 필요합니다.(딤후 4:7) 인내에는 인간의 의지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 곧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도우심”(빌 1:6)을 간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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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저희를 위해 사도 바울로를 세워주시어, 복음을 밝히 설명하게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다시 율법에 매여 살지 말게 하시고, 온 마음으로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인격적 신뢰로 살아가는 믿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저희 일생에 일관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