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성경전서 새번역)
{ 복음 } 마가복음서 3장 31-35절 ….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32]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3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34]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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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 ) 지금도 강원도 태백 지방에 있는 예수원을 방문하면, 사회 직급, 교회 직분 따질 것 없이 부를 수 있는 호칭 “형제, 자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호칭이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혈연으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은,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곧잘 유산 다툼을 하느라고 법정까지 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 자매가 된’ 신도간의 우애는, 신앙적 변절이 없는 한, 서로 무한책임도 져주는 특별한 관계인 것을 우리는 영광스럽고도 송구스럽게 여깁니다.
예수님의 모친, 동생들, 누이들이 예수님 계신 곳까지 찾아왔지만 너무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대뜸 만나지 못하고, 집밖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안에서 이같은 전갈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앞에 앉아 있는 많은 군중들을 바라보면서 “여기 내 어머니, 내 형제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누구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혈연으로 가족이 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의 뜻을 함께 행하며 사는 ‘믿음의 가족’이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잠깐!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행위-율법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존중함이 있어야 행동도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 2 ) 사도 베드로가 그의 편지(벧후 1:5-7)에서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라는 독특한 문체로 권고한 교훈이 있습니다. ‘신도간의 우애’와 ‘사랑’을 구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신도간의 우애야 말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사랑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 안에서, 똑같은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과 영생의 약속을 함께 나눈 형제자매들이, 한 ‘공동운명체의 본능’으로, 서로 무한책임을 져주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충고한 내용입니다.
( 3 ) 어제는 ‘사도 바울의 회심’을 기념하느라고, 어제를 기념일로 정하고 있는 ‘디모데와 디도의 기념일’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서 ‘나의 참 아들이 된 디모데’(딤전 1:2)라고 했고,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딤후 1:2)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디도를 향해서도 ‘같은 믿음을 따라 진실한 아들이 된 디도’(디도서 1:4)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그 밖에는 ‘아들’ 운운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평생 독신으로 살아서, 아들이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발동한 것이었을까요? 그런 것은 아닐 터입니다.
바울 사도는 동역자들을 향하여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빌 4:3)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는데, 진정 믿음의 ‘양떼’들을 목숨을 다해 돌보는 사람들 아니고서는, 이렇게 동료 사역자를 사랑스럽게 부르기가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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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저희가 이 험난한 시대에 주님의 교회를 사랑으로 돌보고 주님의 양떼들과 가족을 마음과 목숨을 다해 돌봄으로, 서로가 주님의 피로 한 형제자매된 의식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