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 후 5주일, 본문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복음 } 마태오 복음서 5장 13-16절 ….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 데에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15]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16]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 = * ( 1 ) ‘종말론’이라는 단어의 파생어로 ‘종말론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성도들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완성된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태도를 ‘종말론적 삶’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죄악으로 부패되지 않도록 사회 속에서 소금다운 역할을 하고, 어두운 죄악과 거짓이 들끓는 세계 속에서 빛의 자녀로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하며 사는 자세를 ‘종말론적 인생관’이라고 말합니다.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려면 음식물 속에 들어가서 녹아지지 않고서는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빛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촛불이나 기름이 빛을 밝히기 위해서는 양초나 기름이 스스로 소멸되는 과정이 있고서야 빛을 밝힙니다.
성도가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하여는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자기 역할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ㅇ. ㅇ. ㅇ. ㅇ. ㅇ. ㅇ. ㅇ. ㅇ
{ 구약 } 이사야서 58장 3-7절 …. [3] “한다는 소리는, ‘당신께서 보아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알아주시지 않는데 고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단식일만 되면 돈벌이에 눈을 밝히고 일꾼들에게 마구 일을 시키는구나. [4] 그렇다, 단식한다는 것들이 시비나 하고 싸움이나 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다니, 될 말이냐? 오늘 이 따위 단식은 집어치워라. 너희 호소가 하늘에 들릴 리 없다. [5] 이 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 고행의 날에 하는 짓이 고작 이것이냐? 머리를 갈대같이 구푸리기나 하고 굵은 베를 두르고, 재를 깔고 눕기나 하면 그것으로 다 될 듯싶으냐? 그게 이른바 단식이라는 것이냐? 그러고도 야훼가 이 날 너희를 반길 듯싶으냐? [6]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7]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
* = * ( 2 ) 오늘 구약 본문 역시, 장차 하느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정의와 질서의 회복을, 성도들이 오늘에 완성하는 것을 권유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권유 또한 ‘종말론적 다짐’이라고 하겠습니다.
절기와 예절의 격식은 잘 따지면서, 내적인 마음가짐은 전혀 결여된 온갖 종교적 행위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살 뿐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진실된 마음으로 정의를 실천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며, 압제 받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진정한 회개요 단식기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ㅇ. ㅇ. ㅇ. ㅇ. ㅇ. ㅇ. ㅇ. ㅇ
{ 서신 } 고린토전서 2장 1-5절 …. [1]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2]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3]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약하였고 두려워서 몹시 떨었습니다. [4] 그리고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 = * ( 3 )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 교회에 갔을 때에, 유식한 희랍철학이나 수사학적 언변을 구사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다만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지혜를 알리기 위해서 힘썼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같은 서신(고전 1:18)에서 말한 바와 같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신앙생활의 기준을, 오늘의 삶에 받아들여, 적용하며 살라는 것이, 오늘 교회가 성도들에게 권하는 교훈입니다.
~~~~~~~~
<기도> 주 하느님, 하느님께서 종말의 날에 이 세상에서 이루시고야 말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오늘 저희들의 삶에 적용하며 살겠습니다. 성령께서 저희들과 함께 계시며 저희를 인도하옵소서. 저희가 거룩한 성도로 살고, 나눔과 용서의 공동체가 되며, 화해와 평화의 매개체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