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아들 비유의 ‘다섯 포인트’

<사순절 제16일, 복음 묵상> …….. (성경전서 새번역)

<< 누가복음 15장 11-16절 >> …. [1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14] …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갔고, … 돼지를 치게 되었다. [16]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 묵상의 서문 } 오늘의 본문(눅 15:11-32)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22개 절의 이야기는 신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한 내용을 가진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류 간의 역사적 관계’라는 주제의 이야기 말입니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담은 최고의 비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순절 제16일인 오늘 다시 이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 자신이 이 비유 이야기 속에서 어느 인물(큰 아들, 작은 아들, 아니면 아버지 집의 종들 가운데 하나)의 위치에 있는가를 살피면서, 오늘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작은 아들’을 어서 아버지 집으로 맞아올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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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장 17-19절 >> …. [17]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19]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 묵상 1 } 누구에게든지 돌이켜 깨닫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차라리 빨리 낭패하여 일찍 깨닫는 것이 다행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 궁지에 빠져 있는데, 그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헤어나오기를 포기한 사람으로 보이더라도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는 기회를 ‘흉년’을 통해서 주실 수도 있고, ‘돼지 치는 일’을 통해서 주실 수도 있고, ‘쥐엄 열매’를 통해서도 주실 수 있습니다.

수 만 가지의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면서, 큰 아들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이 ‘작은 아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그들의 마음 문을 두드려 보는 것(전도, 선교)이 옳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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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장 20절 상반절 >> …. [20상]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 묵상 2 }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히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낯으로 돌아가나?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형은 날 인간으로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야 하나?’ 도대체 장차의 자신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굶주리며 고통을 당하는 날마다의 삶이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

그 어느날, 그는 << 일어나 길을 떠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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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장 20절 하반절 >> …. [20하] …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 묵상 3 }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집을 떠나던 순간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다가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하시던 날(창 3:23)부터 지금까지 ‘아담의 후예’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 돌아왔든, 빚쟁이가 되어서 돌아왔든, 무슨 병이 걸려서 돌아왔든, 폐인이 되어 돌아왔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돌아온 그것 하나만으로도 아버지는 기뻐합니다.

어떤 희랍어 번역가는 이 20절 말미를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눈물로 적시며, 입을 맞췄다.”고 번역했습니다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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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장 21-24절 >> ….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 묵상 4 }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들이 자기가 받아야 할 벌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자마자 말하기를 ‘아들로서의 자격이 없다’느니, 그래서 ‘자식으로 말고 품꾼으로 아버지 집에서 살게 해 달라.’느니 하지마는, 아버지의 귀에는 그 말들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들의 체면을 세워줍니다. 누더기 옷 대신에, 좋은 옷으로 갈아입혔고, 손에 반지를 끼워줍니다. 맨발에는 신을 신겨 신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잔치를 차리게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과거를 일체 묻지 않습니다. 돌아온 것 하나만으로 만점을 받습니다. 이제부터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날로 의인이며, 친자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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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장 24하 – 32절 >> …. [24하]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25]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26]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27]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29]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31]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32]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

{ 묵상 5 } 큰 아들은 모양새를 보면 효자로 보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 집에서 쉬는 날 없이 일을 했습니다. 아버지 허락없이는 자기 집의 가축을 친구들과 함께 잡아먹는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집떠난 동생에 관한 관점은 아버지와 정반대였습니다. ‘그까짓 놈 나가서, 살든 죽든 상관이 뭐냐’는 것이 큰 아들의 심보였습니다.

그것이 드러난 것이 동생이 돌아오던 날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자칫하면 큰 아들의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 떠났던 작은 아들 못지않게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큰 아들입니다. 이 큰 아들을 보면서 율법주의자 유대인을 생각하게 합니다마는, 오늘날은 저와 여러분을 말할는지 모릅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일 터인데, 하나님께서 큰 아들에 대한 걱정이 작은 아들 못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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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구원의 주 하나님,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세상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들이나, 하나님 곁에서 모양새로나마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사는 인간들이나,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주 하나님이시여, 저희가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잊지 말고, 성령님 안에 늘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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