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로의 ‘사랑 장’ 묵상

<사순절 제28일,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만도 1과 } 고린도전서 13장 1-13절 …. [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2]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묵상 1 )>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사, 곧 방언, 예언, 지식, 지혜, 믿음, 기적의 은사들과 엄청난 구제의 일을 행할 능력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사랑의 동기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이 다 ‘헛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진실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은사들이 활용되고, 이웃에게 자선의 손을 뻗치는 일만이 효력을 지닌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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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 묵상 2 )> 사랑이 동기가 되어 사는 사람이라면, 오래 참게 되며, 친절하고, 시기나, 자기자랑이나, 교만이 없으며, 무례나 사욕을 범치 않고, 성을 내거나, 앙심을 품지 않는다 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고, 믿어주고, 소망을 버리지 않고, 오래 참으며, 기다려 준다고 바울로는 정리했습니다.

제 눈에는, 이 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이, <믿어주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참아 준다>(본문 7절)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정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서 신뢰해 주지 않는다든지, ‘그 사람은 안 된다니깐!’ 하며 사람을 포기하는 선언을 한다든지, 관용하고 기다려 줌이 없다면, 그건 사랑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느 누구보다 제가 매일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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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9]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10]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 묵상 3 )> 이 단락은 독특한 논지를 펴고 있는 단락입니다. 특별히 ‘때’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11절에 두 번, 12절에 두 번) 어떤 주석가들은, 이 ‘때’를 ‘종말의 날’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다”(11절)는 구절도 종말론적으로 풀고,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다”(12절)는 구절도 종말론적으로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말론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의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왜 종말론이 갑자기 등장하겠습니까? 이것은 ‘사랑’으로 풀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랑, 그 무한하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본받아 살고자 위해 애쓰는 동안에 점차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의 실체를 보게 된다는 것이 이 단락의 요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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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 묵상 4 )> ‘믿음’으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인격으로 만나게 되고, 자신을 맡겨 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마음에 변절이 없음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희망’이라는 말은 세속에서 쓰는 ‘희망’이라는 말과 뜻이 다릅니다. 세속에서는 장차에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계획을 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희망’은 인간의 계획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장차 이루어 주실 일을 바라는 것을 ‘희망’이라고 합니다.

즉, 장차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고, 역사를 마감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끝끝내 믿고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희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에 이를 것이며, 끝까지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다가, 하느님의 나라를 볼 것인데, 이렇게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의 계획하신 바에 도달하겠지만,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 가운데 영원하신 하느님과 뭇 성도들과 더불어 사랑의 친교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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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느님, 믿음으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온전케 해 주시옵소서. 주 하느님, 저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져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옵소서. 또 비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뭇 성도들과 더불어 영원한 기쁨의 잔치에 참예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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