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신 글로 사람을 살리심

<사순절 제29일, 말씀 묵상> ………. (성경전서 새번역)

{ 복음 } 요한복음서 8장 2-11절 …. [2]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4]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7]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9]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11]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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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묵상 )> ( 1 ) 레위기 20장 10절은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 곧 자기의 이웃집 아내와 간통하면, 간음한 두 남녀는 함께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고, 신명기 22장 22절은 “어떤 남자가 남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 들켰을 때에는, 정을 통한 남자와 여자를 다 죽여서, 이스라엘에서 이런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와서 돌로 쳐죽이겠다는 의견은 모세율법에 부합하는 생각이었습니다.

( 2 ) 하지만 그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에까지 와서, 모세의 법 조항을 언급하며, “(그러니, 모세의 법을 따라 돌로 치려고 하는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아주 고약한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한 여자를 용서해 주어라.’ 하시면 모세의 법을 어겼다고 고발할 터이고, ‘모세의 법에 따라 죽여라’ 하시면, ‘왜 맨날 사랑의 교훈을 말씀하시던 분이, 이번에는 생각이 달라졌소?’ 하며 이중인격자라고 조롱할 근거가 생깁니다.

( 3 ) 언제나 율법을 적용하려 할 때에는 ‘법의 정신’을 파고 들어서, 그 율법의 정신을 어떤 사건에든 적용하는 것이 예수님의 자세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율법의 정신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가르치고 싶으셨습니다.

‘간음을 행한 자는 죽여라’라는 것이 레위기와 신명기의 율법인데, 그 율법은 유대인 사회에서 간음을 금하기 위해서이지 범법자의 목숨을 끊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다시는 간음을 행하지 말도록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지만, 지금 앞에서 벌어진 상황 속에서는, 살기등등한 무리들을 일단 헤치고 싶으셨습니다.

더구나 현행범인 여자를 처벌하겠다고 끌고 온, 자칭 의인들의 삶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눈에는 어느 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 범법자를 처형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할 사람은 없음을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 4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부리고 앉아서 땅에다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뭐라고 쓰고 계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제가 아주 옛날 어떤 설교자에게서, 그때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글은, 인간이 곧잘 범하는 죄목들을 쓰고 계셨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설은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일대기를 그린 어떤 성서영화에서도 그런 설정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상상하는 것 하나는, 만약 그 여인이 몸을 팔아 사는 여인이었다면, ‘이 여인에게 자기와 통간한 몇 사람들의 이름이라도 말하라 해서 이곳에서 그들을 함께 처형하자’ 라고 쓰지 않았을까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은 ‘왜 현장에서 남자는 붙들어 오지 않았느냐?’ 고 쓰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다고 보았습니다.

모세의 법에 ‘(남녀를) 함께 죽이라’(레 20:10)고 했으니,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면 두 사람을 함께 잡아와야 하는데, 왜 남자는 빼돌리고 여자만 붙들어 왔는가가 수상쩍지 않습니까?

( 5 ) 하여간 예수님의 지혜로운 재판이 엄청 비범했던지, 아니면 당시에 둘러섰던 사람들 가운데, 오늘날처럼 간악한 자는 좌중에 없었던지, 손에 들고 치려던 돌을 한사람한사람 땅에 떨어뜨리고 모두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자비와 긍휼, 진리가 승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통쾌하기 그지없습니다.

그후 그 여인에게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죄는 죄이므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네가 그 벌을 다 받자면 감당 못할 터이니, 내가 너 대신 처벌을 받아 주마. 그러니 네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 6 ) 저는 학교 가기 전부터 제 할머니의 지도로 한글을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80대 중반인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한 때는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글을 쓴 제가 지금 회개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사람을 살리는 글을 쓰지 못하고 오히려 죽이는 글을 많이 썼다는 사실입니다.

제 서재에는 연필, 만년필, 볼펜, 사인펜에서 전자기기까지 얼마나 쓰는 도구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종이도, A-4지, 노트, 전자기기까지 합해서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글 몇 자가 세상에서 쓰신 글의 전부였습니다. 그 글씨는 그 날 저녁으로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글은 사람을 살리는 글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기록문화 속에 살고 있는 제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통탄이 저절로 입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아침 기도합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의 말과 글이 사람을 살리는 말과 글이 되도록, 주 성령님, 저희 손과 입과 생각을 순간순간마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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