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요한복음 14장 27-31절 :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다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신 그대로 내가 행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일어나거라. 여기에서 떠나자.” (새번역)
사람들은 ‘평화’를 좋아합니다. 어느 누구보다 평화를 갈망하는 민족은 유대인일 것입니다.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삼 대륙이 만나는 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전쟁이 없는 시대를 거의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로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인사하기를 ‘평화’(살롬) 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유대인들은 평화를 전공하는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평화의 열쇠’를 완결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하셨습니다. 어떻게 세상에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1) 2천년 전은 로마제국이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선전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황제에게 절대복종만 하면 평화가 오리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나라마다 쳐들어가서 속국을 만들었고, 황제에게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칼날 앞에 다른 주장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로마의 번영은 권력자들의 부패와 타락한 생활을 낳았고, 평화를 약속하던 제국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2) 세월은 오래 흘러, 산업이 먼저 발달한 유럽 국가들에 의해서 식민주의 침략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네델란드, 덴마크, 일본 같은 나라들이, 아직 총포를 가지지 못한 나라들을 쳐들어가서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자비하게 살륙과 탈취를 일삼았습니다. 그들의 침략행위에 대해 변명하기를, 속국들에게 신문명을 도입하여 산업을 계발시켜 준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멀쩡한 독립국가를 교묘히 노예백성으로 만드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3) 이 무렵 공산주의 이념을 내세우고 무산자혁명을 일으켜, 부르죠아 계층을 없앰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가져 온다며 무수한 사람들을 전쟁으로 몰아가는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이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지만, 결국 이 이념도 정치적 구실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 국민을 기만하는 이론에 지나지 않음을 세상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시진핑, 푸틴, 김정은 등 소수의 귀족계급이 탄생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4) 현대세계는 두 가지 대표적인 평화 이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팍스 아메리카나’(패권국인 미국에 의한 평화) 라는 이론과 ‘팍스 인본주의’ 라는 이론입니다.
어차피 세계는 하나의 패권국이 세계를 통제하지 않고서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이론을 전개하면서, 패권국인 미국을 위협하는 세력은 무조건 악의 세력으로 몰아붙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우선주의’를 해야겠다고 실토를 합니다. 지금까지 그들을 믿고 따르던 나라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인본주의는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다’는 명제를 절대가치로 앞세우면서, 적대세력을 모두 압살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먼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 죽이기를 해충 죽이듯이 합니다. 말하자면 팍스 아메리카나든지 팍스 인본주의든지 마찬가지로 지배자의 자기변명용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 대부분의 ‘전쟁광인’들은 스스로 평화주의자로 자부해 왔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5) 어느 교단 안에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평화)를 표방하는 단체가, 지난 번 4.15 총선 때 평화의 이름으로 정치운동을 했습니다.저는 그런 운동 말고, 진정한 예수님의 평화운동, ‘나는 십자가 위에서 너 대신 죽고, 그 값으로 너는 사는 평화’,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참 평화의 길임을 알려 드립니다.
일부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평화의 길을 엄숙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이를 실천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라는 냉소를 들으면서도 목숨까지 바치고 있습니다.
“꽃 구경”을 생각해 봅시다. 고려장을 당하러 아들의 등에 업혀 가던 어머니가 아들의 돌아갈 길을 위하여 나뭇가지를 꺾어 깔아 주던 행동에서 평화의 길의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기도> 주 하나님,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는 진정한 평화의 길을 봅니다. 주님께서 진정한 우리의 주님이시며, 평화의 왕이심을 믿고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