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 ‘십자가’ 기념일
요한복음 12장 32-36절. [32]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 [33]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가 당하실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하려고 하신 말씀이다. [34] 그 때에 무리가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인자가 누구입니까?”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아직 얼마 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다녀라. 어둠 속을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36]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어서, 빛의 자녀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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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기독교 신앙의 심볼은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구원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죄인을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하던 날, 빌라도 법정에 모였던 무리들이 “그 피의 책임을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지겠습니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진실로, 우리 인간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피의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만민(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신 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십자가형을 받아 죽으면, 대속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드님께서, 아무 죄 없이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분의 십자가가 대속의 권능을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수차 “내가 들리운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십자가 희생의 예언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우리가 공경합니다. 비록 십자가 위에, 주님의 수난 당하시는 모습과 일그러진 얼굴을 실제의 형상처럼 만들어 달지는 않았어도,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고, 그 분 앞에 예배하게 됩니다.
( 2 ) 나사렛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때때로 여성의 출산에 비유됩니다. 후아나 데 라 크루스(1481-1534)는 그의 저서 ‘위로의 책’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잔혹하고 쓰라린 고난의 시간에 아주 큰 고통과 고뇌로 우리 모두를 낳으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서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사람들을,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얻은 생명들에 비유했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갈 4:19) 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십자가 복음’ 말고 다른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이전에 그가 기록한 문서들 (데살로니가전후서, 갈라디아서) 에서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중심주제로 삼았다면, 이후로는 ‘십자가’ 만을 복음의 핵심으로 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 3 ) 콘스탄틴대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80세 되던 해(324년)에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했습니다. 그 때에 그는 주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곳에 교회를 짓고, 그 십자가의 일부를 잘라, 아들 콘스탄틴에게도 보냈습니다. 그 후로 십자가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독교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죄인인 인류는 도리없이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맞닥뜨릴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가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뵈옵니다. 죄 뿐인 저희를 구원하시고자 자비의 손을 펼치신 하나님 앞에 저희가 무릎을 꿇습니다. 저희를 구원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