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데니스의 기념일에 (공동번역 개정판)
시편 69편 1-4절. [1] 나를 구하소서, 하느님. 목에까지 물이 올라왔사옵니다. [2]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발붙일 것 하나도 없사옵니다. 물 속 깊은 곳에 빠져 물결에 휩쓸렸습니다. [3] 나의 하느님, 눈이 빠지도록 당신을 기다리다가 목 쉬도록 부르짖다가 지쳐버렸습니다. [4] 까닭 없이 나를 해치려는 자, 머리털 수보다 많사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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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데니스(프 Denys, 라 Dionysius, 영 Denis, ? – 250년 경)는 3세기 초 이태리 태생으로, 동료 주교 다섯 명과 함께 고울(옛 북부 프랑스) 지방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빠리에 도착해서, 세느 강 위의 한 섬에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파하던 중, 주후 250년 경 데니스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이 모두 잡혀 목 베임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후일, 그들의 시체가 묻혔던 무덤 자리에 대성당이 세워졌고, 대성당의 명칭을 그의 이름을 따서 불렀습니다. 프랑스의 군주들은 누구나 이곳에 묻히기를 바랐고, 데니스라는 이름은 지금껏 프랑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 2 } 어거스틴이 쓴 한 설교에서 발췌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교에 관하여 말씀으로만 가르치지 않고 친히 본을 보임으로써 순교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몸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구분해서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의 영혼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영혼의 죽음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하느님을 모시지 못한 인간의 영혼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이시므로, 생명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영혼을 저버리시지 않는 한, 우리는 믿음 안에서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몸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순교자들이라고 해서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머리에 돋아 있는 머리털 수까지도 세고 계시다고 했는데,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 때문이지, 실제로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만약 옛 순교자들이 몸의 죽음을 두려워해서 순교를 회피했다고 한다면, 우리가 무슨 이유로 그들의 순교일에 한데 모여 그들을 기념하겠습니까? 그들이 죽음의 두려움도 견뎌냈기 때문에, 우리가 순교자들 영혼 안에 함께 계셨던 하느님을 오늘 찬미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 아닙니까?
그들의 죽음을 우리가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늙거나 병에 걸려 죽는 죽음을, 순교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과감히 고백하고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순교자들을 기념할 때마다 함께 기뻐합시다.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도 가겠다는 신념을 굳게 다짐합시다. 순교자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었습니다. 우리들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우리들이 가진 몸과 똑같은 몸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분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이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 소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순교자들의 명성을 드날리고, 칭송하고, 사랑하며, 그들의 본보기를 사람들에게 가르칩시다. 하지만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찬양 받으실 분은 오로지 순교자들이 섬겼던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기도> 주 하느님, 저희가 주 하느님을 저희 영혼에 모시고 사는 한, 저희에게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믿습니다. 진정 살아서도 하느님을 믿고, 죽어서도 하느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