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복음 } 마태복음 16장 24-27절 …. [24]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소?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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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게 교회가 기념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은 날입니다. 이 다섯 명의 선구자들의 생애를 단편적이나마 메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1 ) 펠림(Felim, ? – 560?)은, 아이오나 섬에 수도원(지금의 신학교)을 창설함으로써 영국 북부지방(지금의 스코틀랜드) 개척선교에 이바지한 콜룸바(Columba)의 아버지입니다.
펠림은 그의 아들 콜룸바를 기독교 신앙과 성경적 지혜를 쌓도록 양육하였고, 땅의 지식보다 하늘나라의 덕품을 지니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이 아직 젊었을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낯선 섬 아이오나로 항해하여, 그곳에 수도원들을 건립하고, 북부 영국에 널리 복음을 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오늘이 펠림의 기일입니다.
( 2 ) 크럼나티(Crumnathy, ? – 610?)는 수도원장이었습니다. 주후 6세기에 어떤 핀(Finn)족 선교사에 의해 아일랜드 북서부 지방 아콘리(Achonry)라는 마을에 설립한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크럼나티가 그곳에 머물며, 기도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수도원장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610년 오늘 별세했습니다.
( 3 ) 어거스틴 베이커(Augustine Baker, 수도자, 사제, 1575 – 1641)는 옥스포드에서 공부를 하고 법률가가 되어, 고향 아버개버니(Abergavenny)로 돌아와 민사재판소에서 판사로 일했습니다. 1600년에 한 교량을 건너다가 자칫하면 죽을 뻔한 일을 겪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후로부터 그는 신앙인이 되어, 1603년에 로마가톨릭에 귀의했습니다. 이탈리아로 가서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자가 되었고,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영국과 유럽대륙을 수없이 오가며 베네딕트 수도회의 역사를 기술하는 일에 일생을 보냈습니다. 특별히 신학적 이슈들이 각 시대에 어떻게 논의되었던가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 별세하여 홀번(Holborn)에 묻혔습니다.
( 4 ) 메리 섬너(Mary Sumner, 어머니회 창설자, 1828-1921)는 영국 쉰튼(Swinton) 출생으로, 섬너(Sumner) 대주교의 조카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세 자녀의 어머니로서, 1876년에 전국교회의 어머니들을 한데 엮는 ‘어머니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어머니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일에 그치지 말고, 집에서 자녀들에게 세례 준비교육을 시키는 일과,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본적 생활윤리를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도록 어머니들을 독려했습니다.
( 5 ) 에딧 슈타인(Edith Stein, 1891-1942)은 독일 브리슬라우의 경건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까르멜 수녀회의 창설자인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영혼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여,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톨릭여성운동에 가담하여 활발히 일하는 동안에, 히틀러의 ‘반-셈족 학살’ 에 항거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수도회를 통해서도 이 활동을 벌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2년 8월 2일 에딧은 수녀원에서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한 주간 후에 처형당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 나라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선구자들을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저희 몫의 십자가를 끝까지 잘 지고 천국 문에 이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