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성경전서 새번역)
{ 만도 2과 } 누가복음 10장 29-37절 …. [29]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35]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 20-30만 원) 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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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마도 강도를 만났던 여행자는 유다인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치안의 책임을 맡은 사람(공무원)들은 제사장들이었고, 제사장을 보좌하는 레위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공직을 잘 수행하라고, 레위지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파의 백성들이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로 그들의 봉급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치안을 책임진 사람들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서도, 모른 척하고 피해 도망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더구나 평소 사마리아 사람들을 ‘구원 못 받을 족속’ 이라고 깔보는 유다인인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 원수 같은 유다인을 끔찍하게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율법교사를 향해서, “네가 원수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네 이웃이다.” 라는 대답을 대신하여, 이런 비유(실화일 수도 있음)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수처럼 생각하는 나라는 일본입니다. 오랜 역사를 두고 그들은 우리나라를 못잡아먹어서 안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원수같은 일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만일 그들의 나라에, 소문대로, 화산이 폭발하여 수많은 일본인들이 갈 곳이 없어 헤맨다면, 한국에 와서 살라고 우리들의 집을 내어주고, 먹을 것을 나누면서 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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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세계교회가 기념하는 믿음의 선배 > 보니파스 (Boniface of Crediton, 675 ? – 754 )
영국의 크레디턴에서 태어난 보니파스의 영세명은 윈프릿 (Winfrith) 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수도원 교육을 받으며 명석해서, 라틴어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하며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30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그의 성경강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적이어서, 수도원이 그에게 신자교육을 맡겼습니다.
43세 때에 그는 유럽 선교를 지망하고 수도원의 지원을 받아 독일로 떠났습니다. 그후 한 번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는 독일을 비롯한 그의 모든 선교지를 자신의 제2의 고향으로 삼아 37년간 개척선교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리하여 이교도들의 아성이었던 독일의 헷세, 바봐리아, 붸스트팔리아, 뷔르템베르크 등 넓은 지역을 두루 다니며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70세가 되어서도 쉬지를 않았습니다. 마인쯔관구장(대주교)의 직책을 퇴임한 후에도, 네델란드와 프리슬란트 지방에서 개척선교를 하던 중, 프리슬란트 폭도들의 기습을 당해 그들의 칼날에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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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저희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일생 귀중한 책임이 있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불쌍한 이웃을 돌보며 사는 이 중대한 사명을 능력껏 감당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