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지극한 관심’이다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구약 } 말라기 3장 18-20a절 …. [18] 그제야 너희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어찌 되는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과 섬기지 않는 사람이 어찌 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다. [19] 보아라. 이제 풀무불처럼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다가왔다. 그 날이 오면, 멋대로 살던 사람들은 모두 검불처럼 타버려 뿌리도 가지도 남지 않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20a] 그러나 너희는 내 이름 두려운 줄 알고 살았으니, 너희에게는 승리의 태양이 비쳐와 너희의 병을 고쳐주리라.

{ 성시 } 시편 1편 1-3절 ….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2]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 복음 } 루가복음서 11장 9-13절 …. [9]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12]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3]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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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때 제가 다니던 직장의 어른이 기도에 대해 말씀하기를, ‘기도는 지극한 관심’ 이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이 제게 의미했던 것은, ‘음, 저 분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말로나 묵상으로 하느님께 고하는 기도를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관심’이 기도라니까, 그저 평소에 기도제목을 메모하듯이 적어 두고, 그 메모가 눈에 띌 때면 ‘음, 그것 좀 준비를 해야 하는데.., 또는 그 사람 좀 어떻게 안 될까..? 정도의 관심만 가지면 될 것 아닌가, 그게 무슨 기도란 말이냐?’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관심이 아니고, ‘지극한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가령, 제가,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할지라도, 성도들이 굳세게 신앙을 견지하기를 바라고, 또 복음이 모든 중국인들에게 선포되기를 바라는 것’ 이 저의 기도제목이라면,

‘주여, 중국의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비록 박해 아래에서라도 믿음을 잃지 말게 하시며, 복음이 온 중국 백성들에게 전하여지도록 도와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평상시 일하면서, 또는 길을 가면서, 또는 쉴 때도, 지금도 박해 아래 있는 중국 성도들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그들의 염려가 나의 염려가 될만치 마음을 기울여 중국 성도들을 관심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20세기 신학자 칼 바르트는 “기도는 하느님의 뜻에 반응하려 애쓰는 인간들이 하느님과 나눌 수 있는 깊은 대화이며, 이웃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하는 사랑의 행위이기도 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역시 일방적으로 인간이 하느님께 청구서를 보내는 형태의 기도방식을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평신도 신학자 C. S. 루이스는 “내가 세상을 향해 품는 마음의 훈련이 기도다. 기도하지 않으면, 나는 사랑할 능력을 잃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루이스에게 있어서는, 기도는 단순히 하느님께 드리는 말(언어)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교회와 이웃을 향한 관심과 사랑을 기르는, 인간 자신의 내적 수련과정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다오.”(룩 22:32)

어떻게 한 차례만 이런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부르신 이래 줄곧 3년 간 이런 기도를 드리셨을 것이고, 그 기도는 말의 기도가 아니라 <지극한 관심>으로서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개역개정-살전 5:17)가 바로 이런 기도가 아닐까요?

<기도> 주 하느님, 저희가 ‘지극한 관심’으로 기도를 드리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저희 기도가 기도의 핵심을 찾아가는, 쉬지 않는 기도가 됨으로, 하느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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