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로고스 – 성령 – 예수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외경)

{ 외경 } 지혜서 1장 4-7절 …. [4]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5]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성령은 거짓을 비켜가고, 미련한 생각에서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한다. [6] 지혜는 다정한 성령이지만, 하나님을 모독하는 무리에게는 그의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 = * 구약의 지혜문학(잠언, 전도서, 시편의 일부)과 외경의 지혜서에서는, ‘지혜’라는 어휘를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류하시는 통로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인간적인 지혜(과학적 지혜나, 삶의 지혜 등)와는 다른 것이어서,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에 인간이 깨닫게 되는 ‘영적 지혜’를 말합니다.

잠언 8장 23-36절에서는 ‘지혜’의 존재양식이 마치 ‘성령의 존재양식’인양 기술되어 있습니다: “[23] 나(지혜)는 태초에 세상이 시작되기에 앞서 처음으로 모습이 갖추어졌다.[24] 심연이 생기고 물많은 샘이 생기기에 앞서 나는 태어났다. [25] 산이 자리 잡고 언덕이 생기기에 앞서 나는 태어났다. [26] 그분께서 땅과 들과 세상의 첫 흙을 만드시기 앞서이다. (이하 생략)”

그러나 구약과 외경의 ‘지혜’는 신약에서 더 이상 그 개념이 사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복음 서두에서 지혜와 유사한 개념의 ‘로고스’(‘말씀’으로 번역되는 희랍어)라는 단어가 동원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내주신 ‘우주의 철리’ 또는 ‘하나님의 지혜의 원리’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서신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할 수 있는 지식도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고(고전 12:3), 인간의 하나님의 자녀됨의 인식,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 모두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롬 8:16, 엡 2:8). 이것은 사도 요한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요일 4:2).

시대에 따라 동원되는 단어(지혜나 성령)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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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루카복음서 17장 1-6절 ….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여!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습니다.

[3] 여러분은 스스로 조심하시오. 여러분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시오. [4] 그가 그대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말하기를, ‘회개합니다.’고 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5] 사도들이 주님께 말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여러분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에 말하기를, ‘뿌리채 뽑혀 바다에 뿌리를 내려라.’ 해도, 그 나무가 여러분에게 복종할 것이오.”

* = * 오늘의 복음본문에는 세 가지 주제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1) 1-2절 : 하나님의 교훈을 똑바로 가르치지 않아서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에, 그런 그릇된 가르침을 준 사람의 죄는 대단히 심각해서, 그는 누구의 죄보다 훨씬 중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 같이 강단에 서는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2) 용서에 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하루에 일곱 번 씩이나 찾아와서, 자기가 잘못을 범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면, 용서를 해 줘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는 ‘일곱 번 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마 18:22)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것은 숫자의 의미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이지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이 꿈으로도 상상하지 못했던, 대속의 고통과 대속의 죽으심을 당신의 몸으로 겪어내신 것을 생각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일이지 않습니까?

3) 마지막으로, 우리의 믿음이 나약하기 그지없는 문제에 대해서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신자’(믿는 사람)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뽕나무를 향해 ‘뿌리째 바다에 옮겨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렇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지금처럼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는 포클레인이 있고, 그것을 대형트럭으로 실어나를 수 있는 시대에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다면, 산이 바다로 옮겨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라”(마 21:21)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친구가 저에게 믿음을 가지고 교회 일을 하라며, 호를 지어주기를, ‘비산’(날아가는 산)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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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세계교회가 기념하는 믿음의 사람 >>

레오 (Leo the Great, 교황, ? – 461) :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이 멸망으로 치닫던 시절에 ‘로마교구장 주교’(교황)의 책임을 맡고, 당시 무차별 학살과 파괴를 일삼던 훈족(452년)과 반달족(455년)에게 침략을 당했을 때, 그는 용기와 믿음으로 그들의 수장들을 만나 전쟁없이 그들을 퇴각시킨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와 인성 문제에 관하여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교리논쟁을 잠재운 공헌을 했습니다. 즉 ‘레오의 토메(통첩)’라는 문서를 모든 교회에 보내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또 참 사람이시다. 두 본성은 혼합되거나 변화되지 않고,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는다.” 그의 이런 교리신학적 정리로써 오늘날까지 모든 기독교회의 정통적 교리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례전의 통일된 전통을 확립했고, 신자들의 일상적인 기도생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교회의 자선활동, 복음전도, 교회교육, 성직자교육 등의 전통을 이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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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성령의 도우심으로 저희 교회들이 힘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구원의 길을 세상이 알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비옵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펼치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시고, 인류가 겪는 모든 전쟁과 갈등과 고통으로부터 평화와 안녕의 길을 보여 주게 하시어, 위기들을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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