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자 되기를 두려워하시오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외경 } 지혜서 6장 1-5절 …. [1] 그러면 왕들이여,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깨달아라. 땅의 끝에서 끝까지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아, 배워라. [2] 수많은 백성을 다스리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하들을 자랑하는 자들은 귀를 기울여라. [3] 그대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그대들의 주권 또한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대들의 업적을 굽어보시고, 그대들의 계략을 낱낱이 살피실 것이다. [4] 만일 주님의 나라를 맡은 통치자로서 그대들이 정의로 다스리지 않았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았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처신하지 않았으면 [5] 주님께서 지체없이 무서운 힘으로 그대들을 엄습하실 것이다. 권세 있는 자들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 = * ( 1 ) 우리들의 선조들이 살던 나라들, 곧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역사는, 역사자료를 다소 얻을 수가 있어서 역사가 바로 정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가 고작 80년이 지났습니다. 그 역사들은 아직껏 ‘정사’가 나오지 않은 듯합니다. 역사에 연루된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그 역사가 모두 올바르게 적히어,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읽을 만한 정사가 작성될 것으로 믿습니다. 정사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필코 역사의 시비가 모두 밝혀지는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사람이 못하면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통치자가 되는 일이야말로, 욕심을 낼 일이 아닙니다. 의로운 통치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정치란 ‘필요악’인가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국민 각자의 죄성과 이기심이 뭉쳐져서 권세자를 악인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통치자의 자리에 앉는 사람들은 희생물인 듯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계교회가 기념하는 티실리오 왕자는 그의 인생에서 바른 선택을 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 2 ) 주후 7세기에 영국의 웨일스 지방에는 Powys라는 왕조가 있었습니다. 그 부족국가에 브로흐웰 이스기드록(Brochwel Ysgithrog)이라는 왕이 살았는데, 그에게 티실리오(Tysilio)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부왕인 브로흐웰은 아들 티실리오 왕자가 자기 곁에서 왕의 통치를 배워야 나중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니 궁전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지만, 티실리오는 왕이 되기가 싫어, 몰래 궁전을 빠져나와, 한 수도원 속으로 잠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좋은 지도자가 되었고, 마침내 수도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실이 부왕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부왕은 여전히 티실리오가 궁으로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그는 거절했습니다.

그후 색슨 족이 웨일스로 침략해서 수도원을 비롯한 모든 시설들을 파괴했을 때, 그는 깊이 상심하여 있었지만, 다른 지방에 있었던 수사 베우노(Beuno)가 그를 찾아와 함께 기도생활을 하면서 힘을 얻어, 재기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티실리오는 영국의 수도원의 전통을 세운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수도원이 1) ‘성경 필사’의 전통을 가지게 했고, 2) 수도원 일과를 ‘공동식사, 노동, 기도’로 얼개를 잡았고, 3) 예배에서 시편 낭송와 찬송을 중심에 두었으며, 티실리오 자신이 웰쉬어로 쓴 찬송시가 여럿 있었습니다. 4) 수도원(교회) 헌당식 때마다 사용할 예문을 작성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교회사적 관심은 초기 영국사(연대기)인 ‘브룻 티실리오’를 정리하게 하여, 영국 건국사, 특별히 오늘날의 영국인들의 필독서로 읽는 아서왕 이야기까지 낳게 하였습니다.

그는 말년에 브르타뉴 반도(프랑스 북부 지방)에 은거하며 보냈습니다. 이는 왕실이 늦게라도 그를 왕으로 옹립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는 수도자로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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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루가복음서 17장 15-19절 …. [15]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16]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18]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19]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 = * 위의 복음본문 19절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맥 가운데, 그의 어떤 행위가 믿음의 근거로 주님의 눈에 보이셨는가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단 하나의 일 즉, ‘감사를 드린 일’이 믿음의 근거로 보였습니다.

감사가 이토록 중요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 가을도 이제 저물어 가지만, 가을은 과연 감사의 계절입니다. 거두어 들인 금년의 수확들을 보면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어리석었던 예상을 깨고 조화롭게 산과 들을 장식한 예쁜 단풍들을 보면서, 우리 가슴에 감사의 념이 솟구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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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느님, 저희의 악하고 이기적인 죄성을 저희의 통치자들을 통해 반영하지 말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통치자들도 하느님의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죄많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통치자들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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