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성 십자가의 날’ 말씀 묵상> (새번역)
( 1 ) 베드로전서 3장 17-18절 = [1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 2 ) 요한복음 3장 14-17절 =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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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돌이 지난 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주일예배에 아빠 엄마 손을 붙들고 함께 갔습니다. 예배 후에 대부분의 회중은 흩어졌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제대 앞까지 아장아장 걸어나가서, 손가락으로 고상십자가를 가리키며, “아파, 아파, 내려와” 라고 계속 안타까와 했습니다. 아이의 소리를 들은 엄마가 아이에게, “예수님 십자가 달리신 거야” 라고 했지만, 아이는 계속 “아파, 내려와” 를 반복했습니다.
그 어린아이의 부모가 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평생 교회에서 살아온 저보다 그 어린아이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상십자가를 만들어, 세우거나 목에 걸고,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한다고는 해 왔지만, 예수님 아프실 터이니 얼른 십자가에서 내려 오시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십자가는 로마제국이 사용한 형틀이었습니다. 지배자로서, 식민지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십자가에 매달아, 불복종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보여 주었고, 반란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을 주는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십자가에 달아 수직으로 세우면, 자기 체중 때문에 못자국에서 출혈이 계속되고, 진통으로 인한 꿈틀거림과, 이로 인한 출혈, 그리고 출혈 때문에 오는 혼절, 이렇게 계속하다가, 이윽고 출혈량이 한계에 도달하면 숨이 끊기고 맙니다. 인간이 고안한 형틀 가운데 가장 잔인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기 위해서, 대제사장은 ‘신성모독죄’로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했지만, 로마법으로는 유대인의 신성모독이 사형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고발내용을 변경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 이라 한 죄, 즉 ‘황제의 통치권에 항거한 죄’ 라고 정죄했습니다. 빌라도는 그것도 사형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의 부하들은, 만약 예수를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총독을 로마황제에게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빌라도는, 일이 시끄럽게 되기 전에, 나사렛 출신의 한 초라한 젊은이, 예수를 죽였다고 무슨 큰 난리가 나겠는가 생각하고, 사형을 집행할 것을 허락했습니다. 지극히 불법한 재판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제국사의 관점에서 보면, ‘피지배민족에 대한 학살’ 가운데 한 사소한 사건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유대교 종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개혁세력에 대해 외세를 빌려 진압한 사건’ 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의지로서의 역사라는 관점에서는, ‘예수를 속죄제물로 삼아,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용서와 사랑이 실현된 사건’ 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 생명의 고귀함을, 저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살아야 할 삶의 방향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 마음이 변치 말게 도와 주시옵소서. 저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십자가만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