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에서 살해 당한 베켓 주교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요한일서 2장 9-11절. [9]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10]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그 사람 앞에는 올무가 없습니다. [11]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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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켓 주교는, T. S.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 이라는 희곡 작품 속의 주인공으로 익히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1118년 런던의 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남달리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캔터베리 대주교 데오발드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대주교는 그의 인물됨을 보고, 유망한 청년으로 여겨, 신학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36세에 사제서품을 받고, 캔터베리에서 총사제직에 앉았고, 다음 해에 영국왕 헨리2세의 궁중자문이 되어, 국왕과 긴밀한 우정을 가지게 되었고, 7년간 의회의원으로, 외교관으로, 군인으로, 교회재판의 배심원으로, 교회와 국가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1162에 베켓은 44세의 나이로,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복지사업과 경건생활에만 몰두하고, 궁중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국왕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마침, 사법권 치리에서 성직자가 피고인 경우, 교회와 국가 사이에 법적 권위가 어느 쪽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 문제로 의견이 갈리어 궁정 안팎에서 일대돌풍이 일게 되자, 베켓은 1164년 프랑스로 도망하였습니다.

타국생활을 하던 베켓에게 국왕이 화해의 전갈을 보내어, 대주교는 6년 만에 캔터베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국왕이 심복 주교를 베켓에게 보내어, 과거 출교처분을 받았던 몇 사람을, 출교처벌을 취소하고 복권시켜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베켓은, 국왕이 교회의 권위를 좌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프랑스 노르만디를 여행 중이던 국왕이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격노해서 분별없는 욕설을 마구 쏟아냈습니다. 이를 곁에서 듣고 있던 충성스런 기사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것은 분명히 국왕이 대주교를 암살하라는 명령이라고 판단하고, 즉시로 도버해협을 건너 12월 29일 캔터베리 대주교의 관저로 쳐들어 갔습니다.

대주교는 기사들에게 쫓기어, 대성당 안으로 피하였으나, 기사들은 칼을 빼어 들고 그를 따라 들어가 수사들 틈에서 그를 찾아내었습니다. 기사들은 그에게 “출교한 사람들을 복권시키시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베켓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의 주님을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었소. 이미 국왕의 요구에 나는 분명한 대답을 주었소.”

그러자 기사들은 “그렇다면, 그 일로 당신은 오늘 죽을 것이오”라고 하면서 칼날을 들이대며 다가섰습니다. 베켓은 두 차례 칼에 찔리우고도 굳건히 서 있다가, 마침내 세번째 칼에 맞고서는 무릎과 팔꿈치로 바닥에 엎드렸지만, 네번째 타격을 받고는 몸에서는 붉은 피, 머리에서는 뇌수를 쏟아내며,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이 온 유럽에 퍼지자, 유럽의 모든 교회들이 그의 죽음을 ‘순교’로 공포하였고, 1173년 교황 알렉산더3세는 베켓을 성인으로 추서하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캔터베리대성당에 안치되었는데, 지금도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의 교회를 충성스럽게 지키고 있는 종들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때때로 교회를 세속적 권위로 누르려는 자들에게서 교회를 지켜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교회로, 진리를 수호하는 교회로, 세상 앞에 부끄럼 없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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