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저자 마르코의 기념일> …….. (신복룡 신구약전서)
<< 사도행전 15장 35-41절 >> …. [35] 그러나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했다. [36] 며칠 뒤에 바울로가 바르나바에게 말했다. “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파한 모든 고을로 형제들을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37] 그런데 바르나바는 마르코라고도 부르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려고 했다. [38] 그러나 바울로는 팜필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 함께 일하지 않은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39] 그리하여 그들은 감정이 북받쳐 서로 갈라졌다. 바르나바는 마르코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났다. [40] 바울로는 실라스를 선택하여 떠났는데, 형제들은 바울로를 주님의 은총에 맡긴다고 기도해 주었다. [41] 그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두루 다니며 그곳 교회들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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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묵상 )> 엄격한 의미에서 마르코는 ‘모태교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모태에 안겨 있을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을 ‘모태교인’이라고 말한다면, 이미 ‘하이틴’ 나이에 다다랐을 때에, 예수님을 자주 뵈었던 마르코를 어떻게 ‘모태교인’ 카테고리에 넣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지녔던 ‘모태교인’의 속성을 마르코에게서 상상하기 때문에 자꾸만 그를 ‘모태교인’으로 취급합니다.
어떻든 일단 마르코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예루살렘에 살던 ‘어떤 마리아라는 여인’의 아들로,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면 그들을 자기 집에 영접하곤 했는데, 때로는 수십 명, 때로는 백 명이 넘는 무리들이 그의 집에 머물면서, 침식을 나누곤 했습니다. 얼마나 그의 집이 컸으면,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마르코의 가정이 대단한 재산가 집안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의 아들 마르코는 마치 어머니의 둘도 없는 종처럼,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들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일에 치이곤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문이 들려올 때면, 아마도 마르코는 큰 일을 치러야 하는 부담감에 눌리곤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잔치를 치르시고자 먼저 두 제자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시며,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을 만나 그의 집으로 따라 들어가, 유월절 잔치를 부탁하라던 당사자가 바로 마르코인 것으로 보입니다.(루카 22:10)
그마만큼 마르코의 집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활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신앙인의 집이었지만, 마르코 자신은 예수님을 메시아 또는 믿음의 대상인 구세주로 여기고 있었던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신앙 때문에 자신이 혹사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저 자신이 ‘모태교인’이었기 때문에, 이런 짐작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아마포 이불을 쓰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사람들이 그를 붙드는 바람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친 무명의 청년이 마르코였다면, 이 기록(마르코 14:51-52)이야 말로, 마르코 자신이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 목격자라는 의미인 것이지, 그가 예수를 따르는 신자는 아니었다는 증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로가 마르코를 무용지물로 보고 있었던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바울로의 회심을 대략 주후 35년 경의 일로 추정하고, 바울로의 제1차 선교여행에서 마르코가 혼자 선교팀을 떠난 것을 주후 45년 경으로, 오늘의 본문인 바울로의 제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바울로와 바르나바 사이에서 티격태격하던 이야기가 주후 51년 경의 일이었다고 보입니다.
말하자면, 1) 마르코는, 첫 순교자 스테판이 순교할 때에, 바울(사울)이 얼마나 설치고 있었던가를 남달리 깊은 인상을 받으며 보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2) 그 후 7년 이상 경과한 후, 마르코는 안디옥에서 바울을 만났을 것입니다. 3) 그리 쉽게 바울로의 지도력에 굴복할 마르코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함께 제1차 선교여행을 하고 있을 때에, 자기 친척 바르나바보다 바울로의 역할이 우위에 있는 것을 차마 보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직 인간으로 땅을 밟고 살고 있는 신자들 간에 일어나는 갈등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서로 갈라선 바울은 제2차, 제3차 선교여행을 마쳤고, 구원의 복음이 먼저 태동했던 예루살렘에 올라가 목숨을 걸고, 반기독교 세력가들과 한 판 대결을 벌였고, 그 덕분으로 꿈에도 그리던 로마행 선편 여행에, 비록 죄수의 몸일지언정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한편 마르코는 오랫동안 사도 베드로의 통역으로 지중해 연안 도시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하던 중, 첫번째로 고귀한 복음서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마르코의 나이 50 전후에 이르렀던 주후 66년에 이르러, 이제 노년에 이른 사도 바울로가 로마에 머물면서 박해의 칼날이 가까운 것을 감지하던 무렵, 모든 갈등이 풀리던 것을 우리는 봅니다. 티모데오후서 4장 11절에서 “마르코는 내가 하는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니 그를 데리고 오너라.”고 부탁하는 짧은 글월이 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 그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화해의 역사는 충분하고도 무수하게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화해의 중재자이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한, 모든 오해와 갈등은 하나님께서 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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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저희가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한, 풀기 힘든 저희 신자간의 갈등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로 풀림을 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비옵나니, 모태교인들이 주님을 뜨겁게 만나게 하시며, 그들이 가지기 쉬운 병통들을 치유받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과 더불어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