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증거판을 주신 하느님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개정판)

{ 조도 정과 } 출애굽기 34장 1-10, 12-14절 …. [1]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돌판 두 개를 처음 것처럼 다듬어놓아라. 그러면 그 돌판에다 지난번에 네가 깨뜨린 첫 돌판에 써주었던 글을 내가 다시 새겨주리라. [2] 내일 아침까지 준비해 놓았다가 아침 일찍 시나이 산으로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어라. [3] 아무도 너를 따라 올라와서는 안 된다. 이 산 어디에서고 사람의 그림자가 얼씬거려서는 안 된다. 이 산 기슭에서는 양과 소에게 풀을 뜯기지도 마라.” [4] 모세는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돌판 두 개를 처음 것처럼 다듬어가지고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그 돌판 두 개를 손에 들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다.

[5] 그 때 야훼께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모세 옆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6] 야훼께서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외치셨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7]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상이 거스르는 죄를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사 대까지 벌한다.”

[8] 모세는 얼른 땅에 엎드려 예배하고 [9] 아뢰었다. “주여,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드셨으면 부디 주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십시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지른 죄와 실수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길이 당신의 것으로 삼아주십시오.” [10]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이제 너희와 계약을 맺겠다. 온 세상 어느 민족 사이에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을 내가 너희 온 백성 앞에서 이루리라. 너희 주변에 사는 모든 백성이 야훼가 하는 일을 보리라. 이제 나는 세상에 깜짝 놀랄 일을 너희와 더불어 해보이겠다. …. [12] 너희가 들어가 그 땅을 점령하거든 거기에 사는 사람들과 계약을 맺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와 섞여 살면 너희에게 올가미가 될 것이다. [13] 그러니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헐고 석상을 깨드리고 목상을 찍어버려라. [14]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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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묵상 )> 증거판은 돌을 깎아 만든 돌판이며, 그 위에는 하느님께서 적어 주신 십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첫번째 증거판은, 모세가 증거판을 가지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오던 날,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며, 자기들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켜 데리고 나온 신이라며 춤추는 난장판을 보자, 너무도 기가 막히고 분개하여 그만 산 밑에 내던져 깨뜨리고 말았지요?(출 31:28 – 32:19)

증거판에 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 되고,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신다는 계약의 증거판인데, 그것을 깨뜨렸으니, 얼마나 송구스런 일입니까? 모세는 하느님 앞에 용서를 빌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증거판을 다시 만들어 주겠으니 시나이 산으로 다시 올라올 것을 명했습니다.(출 34: 1-4)

시나이 산꼭대기에서 만날 약속의 주인공들이 누구였습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가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모세였습니다.

모세가 송구스런 마음으로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한 번 만들어주신 증거판도 고맙기 그지 없는 선물이었는데, 그것을 홧김에 깨뜨려버리고 말았는데, 이제 졸라대서 똑같은 선물을 다시 받기 위해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는 모세의 송구스럽던 마음은 우리의 상상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 앞에서 제사를 드린답시고 춤을 추며 떠들어법석대던 것이 엊그제인데, 그런 자들을 책벌을 대신하여, 증거판을 다시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 심정이, 얼마나 슬프고, 배신감에 떨으셨을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이 잘못이어서’(?), 관용의 마음으로 지난 허물을 오래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낯으로 모세를 만나, 증거판을 다시 주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말씀하시기를 ‘나는 질투의 야훼다. 질투하는 신이란 말이다.’(출 34:14) 하셨습니다. 질투는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지 하느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언어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질투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것에게 한눈을 파는 것은, 하느님도 도저히 보고 지나치지 못하시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것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심정 만이 아닐 것입니다. 주후 21세기에 사는 저와 여러분을, 질투하도록 사랑하신다는 말씀이십니다. 금송아지 앞에서 놀아나던 이스라엘 백성에 못지 않게, 전자기기에 몰두해 있고, 인공지능에 한눈을 팔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하느님께서 상심하리만치 질투하고 계시다고 저는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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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세계교회가 기념하는 ‘하느님께서 질투할 만큼 사랑하신 사람’ } 판디타 마리 라마바이 여사 (Mary Ramabai, 1858 – 1922)

라마바이 여사는 인도의 한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산스크릿(범어) 학자였고, 여성교육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는 아버지에게 산스크릿을 배워, 일찍이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라마바이 여사는 청년기에 영국과 미국을 여행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힌두 전통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 앞에 ‘판디타’라는 경칭을 붙이는데, 이것은 경력상 사회에 끼친 공로가 다대한 사람에게만 주는 인도사람들의 경칭입니다. 라마바이 여사는 여성과 고아들을 위한 교육에 오랫동안 헌신했습니다. 학교를 설립하여, 자신이 직접 교육 일선에서 일하며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소시적에 부모를 잃었고, 오빠도 사별했으며, 결혼을 했었으나,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 인도 사회에서 과부들이 당하는 차별과 고통을 자신이 직접 당했지만, 살림을 최소화 하면서, 오로지 인도의 계급차별, 여성차별, 특별히 소녀들의 조기결혼 같은 그릇된 풍습을 타파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해 ‘묵티(Mukti) 선교회’를 설립하고, 이 기구를 통해서 과부, 버림받은 여성, 고아 소녀, 기근 피해 여성들을 구제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라마바이 여사는 1922년 오늘 별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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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느님,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 못지 않게 저희를 질투하실 만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저희가 하느님 외에 그 어떤 것에도 정을 두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염려하며 관심하시는 것에 저희도 마음과 정성을 쏟으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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