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 사로잡힌 칼라일 사제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 서신 } 로마서 8장 33-39절 …. [33]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6] 우리의 처지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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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묵상 )> 오늘은 세계교회가 윌슨 칼라일(Wilson Carlile, 1847 – 1942) 사제를 기념합니다. ‘칼라일’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영국의 저술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 – 1881)을 기억하지만, 오늘 기념하는 분은 복음전도자 윌슨 칼라일입니다.

칼라일은 어려서부터 척추가 약해서 학교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불치의 질환으로 인해서 그의 가족의 내력인 런던의 한 성공회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에 기대고 자랐습니다.

몸도 약하고 배운 것도 별로 없었지만, 먹고는 살아야 해서, 그는 청년기에 유럽 국가들에서 직물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사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1873년에 유럽 일대에 몰려온 경제불황으로 사업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그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신앙적 해법에 걸고, 대중전도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던 무디-생키의 전도집회에 자주 출석했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익혔던 ‘리드 올간’(풍금)으로 찬송 부를 때에 반주하는 일로 전도단을 자원봉사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무디의 대집회에 출석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런던 남부에 따로 모이던 다른 집회에 말씀을 맡고 있었던 담당자가 오지 못할 사정이 생겨서 강사를 재빨리 구해야 했습니다. 무디와 생키는 칼라일에게 간증의 말씀을 전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칼라일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간증으로 은혜를 나눈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성직과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878년에 런던 디비니티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하여 1880년에 부제로, 그 이듬해에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런던에는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임명된 교회 근처에도 인구는 들끓었지만, 교회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칼라일은 무디-생키의 전도방식을 경험한 바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교회로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대중들에게 찾아가는 목회를 구상했습니다. 그리하여 시작한 것이 가두전도였습니다. 런던 거리에서 성경강해를 했고, 예배(성공회 성찬식)를 드렸습니다.

그가 신학교를 입학할 무렵, 런던에서는 또 하나의 신앙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리교 배경에서 출발하여,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창설한 구세군(Salvation Army) 활동이 있었습니다.

칼라일은 부스와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군대식 조직력을 성공회에도 도입할 수는 없을까 궁리하다가, 1882년에 <평신도를 중심으로> 전도단을 조직하고 이름을 ‘Church Salvation Army’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구세군’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Church Army’라고 고쳤습니다.

이리하여, 교회와 노동자 계층 간의 간격을 좁히려는 그의 신념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다만 성공회에 소속한 사제로서, 교회 건물이 없이 가두에서 회중을 모아 설교하고 예배를 드리는 모임의 형태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격식을 선호하는 성공회의 성직자들과 신도들은 이것을 ‘파격’이라고 하여 그리 동조하지 않았지만, 칼라일은 끝끝내 ‘거리 목회’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Church Army’는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했고 세계적 유대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42년 9월 25일, 95세로 별세하기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는 거리에서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30년에 열린 세계성공회 주교회의(람베스협의회)의 연사로 초청받아 ‘복음 증거의 위력’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성찬예식의 말미에서 ‘이제 나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라고 파송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착한 사람들, 방황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회중들이 착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를 바라십니까, 방황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시기를 바라십니까? 주교님들께 간곡히 부탁합니다. 회중들이 흩어져서 세상 속에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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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느님, 현실 교회에서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어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시던 윌슨 칼라일의 ‘거리 목회’를 알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착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착한 예배를 드리는 옹졸함을 저희가 벗어나게 하시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만나기 쉬운 거리로 저희의 목회 현장을 넓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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