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시의 프란시스 기념일> …………… (공동번역성서)
{ 만도 2과 } 루가 복음서 6장 27-31절 …. {27]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29]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30]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31]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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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시스의 생애 )> 아씨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1181 – 1226)는 이탈리아 중부지방에서 직물 장사를 크게 하던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프랑스인이어서 아기의 이름을 ‘프랑스 사람’ 이라는 뜻의 ‘프란시스’라고 지었습니다.
아버지는 장차 이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줄 계획이었지만, 아들 프란시스는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바깥으로만 돌았습니다. 처음에는 동네 청년들과 노래와 잔치로 즐기기만 하더니, 점차 자라면서는 군인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1202년경 그의 고향 아씨시와 이웃 도시 페루자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프란시스는 아씨시를 위해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페루자에 붙들려 가서 1년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석방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전처럼 세상을 즐기는 버릇은 잊은 듯 보였습니다.
1205년에 남부 이탈리아 군사원정에 참여하려고 길을 떠났지만, 그는 스폴레토라는 지방까지 갔다가, 군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군인이 될 꿈을 포기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길에서 나환자를 만나면, 멀리 피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지만, 이 무렵, 한 나환자를 길에서 만났는데, 그는 나환자를 피하기는 커녕 다가가서, 지니고 있던 것으로 그에게 구제하고, 온 몸으로 부둥켜안은 일이 있었습니다.
또, 그는 기도를 위해서 교회에 오래 머무는 일이 잦았는데, 그가 자주 기도처로 사용한 곳이 ‘산 다미아노 교회’였습니다. 그곳에서 기도하던 중, 프란시스는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시는 말씀, 곧 ‘프란시스야, 가서 무너져가는 내 집을 고치어라!’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좇아 그는 말씀 대로 쓰러져가는 교회들을 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리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아끼던 물건을 팔았습니다. 아버지는 격노했습니다.
결국 부자지간의 싸움은 주교를 찾아가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프란시스는 그 자리에서 이제부터는 ‘내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뿐’이라면서, 여지껏 그를 두호해 주었던 신분과 재산상속권을 모두 버리고, 철저히 하느님의 자녀로만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때부터 청빈생활을 하면서, 날이 갈수록 깊은 경건생활에 돌입했습니다. 입고 있던 옷을 거지들과 바꿔입고, 예수님의 말씀 “식량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마 10:10) 하신 대로,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않은 채,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회개와 평화의 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베르나르도, 베드로, 에지디오 등이 초기부터의 동료였으며, 1209년에는 모두 열두 명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훗날 자신들을 ‘작은 형제들’(Friars Minor)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프란시스는 열두 형제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자신들의 공동체를 교회가 인준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비록 구두로라도 ‘순회전도를 위한 공동체가 될 것’을 명 받았습니다.
얼마 후 동향 아씨시로부터, 클라라라는 여인의 방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는, 여성도 형제들의 공동체에 받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프란시스는 그녀에게, 차라리 여성을 위한 수도회를 창립할 것을 권하면서, 1212년에 클라라와 그녀의 여자가족들, 그리고 동료를 합하여 ‘가난한 여인들의 회’(성클라라수녀회의 전신)를 설립하게 해 주었습니다.
프란시스의 생애 중에서, 1219년 그의 이집트 방문은 참으로 이채로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는 한참 동유럽과 중동아시아에서 십자군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작전지역을 가로질러서 이집트 진영으로 들어가 ‘술탄 알말리크 알카밀’을 접견한 것입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전쟁을 그치게 하려고 했다고만 전해질 뿐, 그들의 접견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떻든 죽임을 당하지 않고 이집트군 사령부를 빠져나온 프란시스와 그의 동료들이 천신만고 끝에 작전지역을 벗어나자마자, ‘십자군 전투야 말로 하느님께서 바라시지 않는 것’이라는 프란시스의 신념에 동조하여 그들의 수도단체의 회원이 되고자 구름같이(수 천 명의) 청년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리하여 신학공부를 거친 형제들이 다수 회원으로 가담하게 되면서, 프란시스의 단순 소박한 리더십은 더 이상 공동체에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프란시스 형제회는 기구적으로 다수 유럽 국가들에서 수많은 수도회로 늘어났지만, 프란시스는 한 사람의 회원으로 1223년 성탄절에 그레치오에 머물면서 독특한 성탄절 기념물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베들레헴 마굿간’의 원형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아기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이 마굿간에서 목자들의 방문을 받습니다.
소박한 이 조형물은 예배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오늘날 성탄절에는 예전적 교회들이 모두 이 ‘마굿간 경배’를 중요한 예식으로 거행하고 있습니다.
1224년 프란시스는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로 라 베르나(La Verna) 산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거기서 깊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의 몸(두 손, 두 발, 옆구리)에 기이한 상처가 생겼습니다. 이를 사람들이 ‘성흔’(부활하신 주님께서 지니셨던 거룩한 상처)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무렵, 프란시스는 그의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 이르렀는데, 육신의 시력은 잃었지만, 영의 시력이 밝아져서 ‘피조물의 찬가’(Canticle of Creatures)라는 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에서는 모든 천체와 지구 위의 식물과 동물들, 그리고 심지어 죽음 마저도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1226년 10월 3일 저녁, 프란시스는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공동체의 전통으로 매 해 10월 3일 저녁에 ‘Transitus’(건너감) 이라는 노래로, 프란시스의 생명이 이 땅에서 하늘 나라로 옮겨간 것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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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느님, 이 세상에서 온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닮아 청빈으로 살고, 만물을 사랑하면서 살려고 애쓴 프란시스의 생애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진정 저희도 그에게서 애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본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