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 느 님 은 살 아 계 시 다”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욥기 19장 23-29절 (공동번역)

[23] 아, 누가 있어 나의 말을 기록해 두랴? 누가 있어 구리판에 새겨두랴? [24] 쇠나 놋정으로 바위에 새겨 길이길이 보존해 주랴?

[25]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26]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27]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 그러나 젖먹던 힘마저 다 빠지고 말았구나.

[28] 자네들은 어떻게든지 나를 몰아세울 작정이군. 결국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이겠지. [29] 그러나 칼에 맞지 않기 위하여 조심해야 할 것은 오히려 자네들일지도 모르네. 칼에 맞을 죄가 어디에 따로 있다던가? 시비곡직을 가리는 재판이 끝내 없겠는가?

* * * *

욥기 1장 1절에, 욥에 관하여 이르기를,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훌륭한 인격분자도 죽음을 목전에 둔 힘든 상황을 맞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절규합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비록 안타까운 절규이지만, 확신에 찬 절규입니다. 비록 지금 눈 앞에 하느님의 존재의 확증을 보지는 못해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실존을, 마침내 자기 눈으로 뵐 것이라는 신앙을, 한 마디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뵙지 못해도, 죽은 후 나의 시체가 썩어서 형체가 사라지는 날이 오더라도, 내 간뇌가 다 허물어져 홁 속에 으깨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나의 눈의 그루터기가 흙 사이 그 어딘가에 남아서, 주 하나님을 뵙고야 말리라, 이것이 욥과 함께 외치는 우리들의 절규인 것입니다.

유대교 3천년 역사에, 기독교 2천년 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사는 것 자체가 죄로 규정을 받아, 더러는 스데반처럼 돌팔매질을 당하여 죽어갔고, 더러는 바울처럼 칼날에 죽어갔고, 더러는 순교자 조희렴목사처럼 총탄에 맞아 죽어갔고, 더러는 폴리캅처럼 화형을 당했고, 더러는 유그노들처럼 살갗을 벗기어 죽어갔고, 더러는 유대인들처럼 가스실에서 죽어갔고, 더러는 본회퍼처럼 목매달려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습니다. 그들이 참혹한 죽음을 죽었어도, 그 다음 순간, 그들의 죽음을 끔찍히도 귀히 보시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육체의 시신을 사람들이 거두기도 전에, 하늘 나라에서 이미 하느님의 천사들로 하여금 그들의 상처난 아름다운 영혼들을 곱게 맞이하곤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비록 세상은 참혹한 죽음을 그 아름다운 영혼에 주고 있지마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하늘의 천사들로 하여금 귀하게 하늘나라에 영접하신다는 사실을 저희는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욥도 살았고, 저희도 살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시여 영원토록 홀로 영광 받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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