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면..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루가의 복음서 11장 17-18절 (공동번역)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큰소리로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고 외치자 [18]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대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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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행복을 논한 한 철학자는, 그의 행복론을 시작하면서 첫 페이지에다 한 그림을 실었습니다. 커다란 암퇘지 한 마리가 양지 바른 곳에 누워서 열 마리 가량의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사진 아래 그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이 행복한 암퇘지를 보라. 그는 문명의 옷을 입을 욕심도 없고, 벌거벗었다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2천 여년 전에 살다가 죽은 이 앞에 예배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이 글을 읽으면서, ‘2천 여년 전에 살다가 죽은 이’ 가 나사렛 예수님을 말한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철저히 반기독교적인 행복론을 말하겠다는 것이로구나 하고, 책을 접었습니다.

성경 안에도 충동적인 청춘예찬이 있습니다. “그러니 젊은이들아, 청춘을 즐겨라. 네 청춘이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겨라.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아라.” (전도서 11장 9절상) 어떻습니까? 동의하실 만합니까? 글자 그대로 풀면, 대단히 위험한 행복론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재판에 붙이시리라는 것만은 명심하여라.” (같은 절 하반절) 만약 이런 말씀이 바로 뒤에 붙어 있지 않다면, 아주 반기독교적인 행복론이 될 뻔했습니다.

영국의 버트란드 럿셀(1872-1970)은 대단히 위험한 행복론을 펼친 사람입니다. 그는 교회교육 또는 기독교가정의 훈육이, 행복할 수 있는 인간들을 불행에 빠뜨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옥 공포의 주입’, ‘자연스런 인간 생리 현상을 죄로 인식시키는 일’, ‘정다운 이웃을 신앙적 차이로 원수시하는 일’ 등, 교회의 이런 ‘과오’들이 어서 속히 사라지는 것이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조건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럿셀 말고도 많은 저술가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계율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그릇된 생각을 전파하고 있는데, 오늘 성경본문의 말씀에 완전히 정면으로 도전하는 생각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행복하다고 하겠느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기를 좋아하고, 그 말씀에 따라서 사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 그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저도 젊은 세월이 있었습니다. 한 80년 살고 보니까, 이 말씀이 정녕 맞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의 테두리 안에 사는 것이, 참 자유이며, 참 행복의 충분조건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네 원수도 사랑하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살인하지 못한다.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 …”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들입니까?

<기도> 주 하느님, 하느님의 계율이 저희의 보호장치가 되어, 저희의 안전, 저희의 행복의 조건이 됨을 믿습니다. 날마다 주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삶으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늘나라 백성으로 사는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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