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다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빌립보서 1장 19-26절 (새번역)

[19] 나는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압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21]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22]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25]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26]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가면,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 때문에 많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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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버지는 평양서 ‘서문밖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던 중 남한으로 피난했습니다. 물론 제 어머니를 포함한 저희 다섯 형제들을 데리고 피난했습니다. 그 후로 1968년에 아버지는 작고하셨고, 저희 형제들은 한국과 미국에 각기 가정을 이루어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가끔 저희 형제들끼리 이런 주제로 토론한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인 저희 아버지가, 자녀들과 함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피신한 것은, 개인적인 선택으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한 교단의 목사이며, 지역교회의 담임목사인 아버지가 교회와 교인들을 버려 두고 피난을 떠났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동의하실 일인가?”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북한에 계속 남았더라면, 분명히 순교를 당했을 것인데, 교회와 교인들을 지키기 위해 그 위험한 곳에 남아 있어야 했단 말이냐?” 고 흥분해서 말하는 형제도 있었습니다. “순교를 각오할 것 아니면, 왜 목사가 되셨어?” 라고 이론적인 반문을 하는 형제도 있었습니다.

이런 토론은, 그 당시에 어떤 결론을 산출하고자 했던 토론은 아니었고, 남한으로 피난할 결정을 하던 당시에, 목회자로서 어떤 선택의 씨름을 하신 것이었을까, 그의 자식들로서 질문을 제기해 보았던 토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누구도 모를 일이지요.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의 편지를 쓴 것이, 주후 62-64년 기간 중의 일이었고, 이 편지를 쓰고 나서 약 3-5년 후에 순교를 당하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하지만, 자연사 또는 병사나 사고사가 아니라, 순교를 당하는 일은 예사 일이 아닙니다. 박해의 칼날이 번뜩이는 속에서 복음을 들고 낯선 이들을 찾아 만나는 활동이야 말로, 기름통을 등에 지고 불붙는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는 일과 마찬가지의 위험한 일입니다.

이 일을 날마다 공공연히 진행하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야 말로 복음의 투사 가운데도 투사라고 보아야지요. 그런 상황 속에 있었던 사도 바울이 “저 자신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얼른 있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러분(편지의 수신인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육신으로 아직 살아 남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23-24절을 풀은 글) 라는 말씀을, 살아 남기를 바라는 ‘언어 플레이’ 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복음전도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므로, 생명을 걸고 추진하는 일입니다. 마치 산모가 생명을 걸고 아기를 해산하듯이 말입니다. 일평생 우리는 이 일에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번져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이 일에, 저희가 소극적이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저희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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