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마태복음 6장 9-15절.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10]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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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대제사장 안나스의 관사 뜰에서, 베드로가 아주 못할 짓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비병에게 뺨을 맞으시며 철야 취조를 받으시던 그 춥던 밤에, 그 뜰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부인합니다. 어느 화가가 그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엄청난 변절의 현장을 목도하셨을 것입니다(요 18:15 이하).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베드로를 만난 일은, 예루살렘 어느 곳에서,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던 때”(요 20:19)였습니다. 예수님의 첫 말씀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유대인의 인사법입니다. “샬롬 레카”(당신에게 평화가). 그러나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 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 이후에도 이 일을 두고 서로 해명하고, 용서 받는 단계를 밟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그냥 지나갑니다. 용서가 끝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언제? 이미 변절 현장에서…?
( 2 )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에서 기독교는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인간들은 서로 용서하지 못한 채 원수지고 사는 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입니다. 일방적으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용서 역시 무조건적입니다. 그리고 일방적입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 용서를 빌어도 우리는 용서합니다.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을 고맙게 여기고 말씀대로 따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 부연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라” 하셨습니다. 그 용서와, 그 사랑이 원수에게 원한(숯불)을 갚는 길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12장 20-21절).
( 3 ) 용서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용서 받아야 할 사람이 용서한 것을 모르고 있다면, 아직 용서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용서를 받을 사람에게 용서했다고 선포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기도>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기쁨을 모르던 저희에게 용서의 기쁨을 가르쳐 주셨나이다. 십자가의 용서로 이 세상을 용서와 화해와 사랑으로 가득차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