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요한복음 9장 1-3, 6-7, 33절. [1]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 [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 [33]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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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는 아직도 사람을 운명론적으로 보는 관습이 있습니다. ‘불가촉천민’ (몸이 닿게 되면 해를 입는다는 뜻) 이라고 차별하는 ‘달릿’이라는 계층의 3억 5천만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초등학교 공부를 할 기회도 주지 않습니다. 그냥 쓰레기 치우기, 죽은 짐승 치우기, 화장실 청소 같은 허접한 일이나 하면서 평생을 살도록 운명지웁니다. 너무 엄격하게 차별하기 때문에, 달릿들 스스로도 아예 천하게 살기로 맘 먹습니다.
인도 사람 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사람에게도 그런 습관이 있습니다. 누가 뭘 좀 해 보려고 하면, “꼴깝하네”, “그 사람은 도울 필요 없어, 그는 그러다 가는 거야”, “내 그럴 줄 알았어. 걔는 안 된다니깐..”, 이렇게 몹쓸 말을 무심코 내뱉습니다.
옛날 유대인에게는, 불치의 병을 앓거나,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자기 죄, 아니면 조상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데에는 효력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건 병리학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원인 분석 자체가 잘못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릇된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대신 “세상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 모든 현상들은 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이다”는 대명제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이 선언을 증명하시기 위해,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신 일 만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은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중 장애를 지녔던 헬렌 켈러의 눈을 뜨게 해 주시지 않았지만, 그의 보지 못하는 눈으로, 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물을 보게 하셨고, 하나님의 일을 증언케 해 주셨습니다.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굴레를 씌우시지 않았습니다. 누구든 자유케 해 주셨고, 창의적으로 살게 하셨고, 각자가 ‘자기 나름의 꽃’을 피우게 하셨습니다. 비록 장애를 가졌더라도, 출소자라도, 무학이라도, 가난해도, 달릿이라도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운 꽃들입니다.
악령은 인간에게 굴레 씌우기를 일삼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서 굴레를 벗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살아도 천 년의 가치를 남기게 하셨습니다. 거룩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맘껏 섬기며 사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모든 인류에게서, 어떤 운명지워진 인생을 산다는 미신을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시며, 저희 각자에게 심어주신 꽃씨들을 곱게 피워내는 복된 인생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