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생활과 생활예배와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신복룡 신구약전서)

{ 서신 차용 } 사도행전 17장 22-25, 29-34절 …. [22] 바울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 서서 말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측면에서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며 예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살지 않습니다.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

[29]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무지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냥 보아 넘기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31] 하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사람을 시켜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살리시어 이런 이적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하셨습니다.”

[32] 그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33] 바울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다. [34] 그때 몇몇 사람이 바울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아레오파고스 의원인 디오니시오스가 있었고, 다마리스라는 여인과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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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묵상 )> ( 1 )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창조된 존재들입니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 이라고도 말하지만, ‘service’ 라고도 합니다. ‘service’ 라는 단어는 ‘예배’ 라는 뜻으르도 쓰이지만,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뜻, 곧 ‘봉사’ 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이 ‘service’ 라는 말을 사용해서 설명해보자면, 예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 믿는 회중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 service A’ 가 있고, 믿는 회중들이 곳곳에 흩어져 나가서 ‘이웃들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어려운 삶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섬김 service B’ 가 있습니다.

‘service A’(예배생활)가 온전하기 위하여는 ‘service B’(생활예배)가 충실히 이루어져야 하고, ‘service B’, 곧 복음전파와 사랑의 섬김이 온전하기 위하여는 ‘service A’, 공 예배가 충실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두 발로 걸을 때에, 오른발과 왼발을 교대로 짚는 것과 같습니다. 오른발을 짚을 때 왼발이 걷게 도와주고, 왼발을 짚을 때 오른발이 걷게 도와주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회중이 모여서 예배하는 ‘service A’ 에만 열심을 보이는 사람이나, 흩어져서 이웃을 섬기는 일, 곧 ‘service B’ 에만 열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멀리 오래 걷기(진행하기)’가 힘듭니다.

말하자면, 신입교인들이 낙오하기 쉬운 예가 ‘service A’ 와 ‘service B’ 의 발란스가 잘 맞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2 ) 사도 바울로가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에, 인간의 진정한 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로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제물로 죽게 하실 정도로 인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했습니다. 그 분은 죽은 후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때에 몇 사람들은 긍정적인 관심을 보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소했습니다. 부활을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낙심치 않았습니다. 이 때를 회고하면서, 사도 바울로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나는 …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밖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2:2, 5)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말하려면, 인간의 <죄와 회개>를 말해야 하고, 십자가로 인간의 죄가 <대속되는 이치>를 설명해야 하고,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예배와 말씀의 전례(설교)에서 얼마나 죄와 회개와 성령에 속한 변화와 성장에 관해서 자주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별로 그렇지 못한 것을 한탄합니다.

‘service A’ 에서 성찬식이 종종 형식에 불과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 3 ) 스코틀란드의 토마스 랏트레이(Thomas Rattray, 1684 ? – 1743)주교는 바로 이 문제, 곧 ‘왜 성공회가 예전은 다른 교단에 비해 퍽 발달해 있는 것 같은데, 복음의 열정은 식어져 있는가’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일생 노력한 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부들(초기 기독교)의 신학을 연구하면서, 발견했던 세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가) 교회가 성찬의 신비를 상실하면서, 영적 동력을 상실했다.

나) 초대교회의 영성을 되찾아야, 교회는 그 영성을 회복할 수 있다.

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면, 예배도 의미를 잃고, 삶도 의미를 잃는다.

그리하여 18세기의 교회지도자였던 랏트레이 주교가 얻은 결론은, 영국교회의 옥스포드 운동으로 대표되는, 예전적교회가 되려는 노력에 못지 않게, 스코틀랜드교회(청교도)가 표방한 복음의 열정을 회복하려는 운동을 교회 안에 조화 있게 보유하려는 노력이 요긴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일에 이 견해를 교회 속에서 반응한 것 하나가 영국의 교회개혁운동이었던 존 웨슬레(1703 – 1791)의 메토디스트 복음운동이었습니다.

랏트레이 주교는 진실로 석학이었으며, 생활 속에 경외심을 늘 유지했고, 엄격한 성무일과 준수를 위해 힘썼던 이였습니다.

랏트레이 주교의 기념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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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기 위해 애썼던 랏트레이 주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날에도 성서가 전하는 복음과, 초대교회 교부들이 전한 믿음을 잘 보전함으로 진실로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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