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공동번역성서)
{ 만도 1과 } 사도행전 25장 13-22절 …. [13] 며칠 뒤에 아그리빠 왕과 베르니게(* 아그리빠의 이복 누이)가 가이사리아에 와서 페스도(* 로마 총독)를 예방하였다. [14] 그들이 거기서 며칠 머물러 있는 동안 페스도는 바울로의 사건을 왕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펠릭스(* 페스도의 전임 총독)가 나에게 인계한 죄수가 한 사람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유다인의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그 사람을 고발하면서 단죄해 달라고 합디다. [16] 그러나 나는 우리 로마의 관례로는 피고에게 원고 앞에서 고발에 대하여 항변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를 넘겨주는 법이 없다고 일러주었습니다. [17] 그랬더니 유다인들이 여기에까지 나를 따라왔으므로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 다음날로 법정을 열고 그 사람을 불러오게 했습니다. [18] 원고들이 일어서서 그에 대한 죄목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예측했던 죄목은 하나도 없었고 [19] 다만 자기네 종교와 죽은 예수라는 사람을 두고 서로 의견을 달리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그 예수가 살아 있다고 주장합디다. [20]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망설이다가 바울로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을 받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21] 그러나 그는 황제의 판결을 받을 때까지 그대로 갇혀 있게 해달라고 하기에 나는 그를 카이사르에게 보내게 될 때까지 그대로 가두어두라고 명령했습니다.” [22] 이 말을 듣고 아그리빠가 자기도 직접 그를 심문해 보고 싶다고 하였다. 페스도는 “내일 그를 심문해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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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묵상 )> 사도행전을 작성한 루가(희, Loukas)의 수고로, 로마 총독과 분봉왕이었던 희랍 사람 아그리빠가 나누었던 은밀한 이야기까지 성경(사도행전)에 수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그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지중해 연안 도시 가이사리아에서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는 지금 가이사리아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로라는 죄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총독 페스도의 견해로는 바울로에게 아무 죄가 없는 것 같은데,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서로 종교적 견해의 차이가 대단히 심각한 대결을 이루는 것 같다는 코멘트였습니다. 그가 올바로 사태를 알아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페스도가 바울로에 관해서 말하는 내용이 ‘문제의 소지는 바울로가 예수라는 사람을 신격화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그는 죽은 예수를 지금도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페스도와 아그리빠 왕, 두 사람의 표정이 어떤 것이었을까를 저는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며 조롱섞인 표정이 저의 눈앞을 스쳐갔습니다.
이것은 페스도 총독과 아그리빠 왕 사이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고, 21세기인 오늘날도 모든 불신자들 사회에서 그들이 기독교인들의 부활신앙을 화제에 올릴 때면 얼굴에 늘 짓곤 하는 표정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본문 19절을 읽으며 잠시 불쾌한 감정이 솟았습니다. ‘또 불신자들의 조롱어린 대화를 듣는구나.’ 하면서..
그리고 오늘의 묵상을 19절에서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그를 에워싼 강력한 불신의 세력들 앞에서 어떤 자세로 대응했던가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1) 바울로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부활이 무가치한 논제일는지 몰라도, 바울로에게는 생사를 걸고 믿는, 핵심적 신앙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 오라토리오에 나오는 할렐루야 합창을 누구나 ‘힘찬 음악’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음악적으로 곡 분석까지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음악사 차원에서 해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가 길이 다스리실 세상’ 을 선포하는 감격이야말로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 아니면 누가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2) 바울로는 적어도 성령 안에 살지 않는 사람은 부활을 학습하고 탐구할 수는 있어도, 부활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토전서 2장 14절에서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이런 한계는 불신자들에게만 아니라, 표면적으로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현상인 것을 말합니다.
3) 바울로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하대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를 힘썼습니다.
오늘 본문의 연속선상에서 있었던 일, 곧 아그리빠 왕 앞에서 바울로가 자신의 회심이 어떻게 일어났던가를 간증하는 자리에서 왕이 바울로에게 “그대는 그렇게 쉽게 나를 설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했을 때, 바울로는 애타는 음성으로 왕에게 권고합니다. “쉽게든 어렵게든 저는 전하뿐 아니라 오늘 제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저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느님께 빕니다. 물론 이 쇠사슬만은 제외하고 말입니다.”(행 26: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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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느님, 믿음 없는 이 세대를 탓하지 말게 하옵소서. 오히려 먼저 믿는 저희들의 마음에서 부활 신앙에 관한 저희의 열렬한 신앙이 사라지고 있음을 애태우게 하시며, 사도 바울로 처럼 부활의 믿음을 이 불신세대를 향하여 선포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