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 (새번역)
{ 조도 성시 } 시편 1편 ….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4]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5]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6]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 만도 성시 } 시편 4편 1-5절 …. [1]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2] 너희 높은 자들아, 언제까지 ‘내 영광’(* ‘영광의 하나님’)을 욕되게 하려느냐? 언제까지 헛된 일을 좋아하며, 거짓 신을 섬기겠느냐? (셀라) [3] 주님께서는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각별히 돌보심을 기억하여라.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들어 주신다. [4]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짓지 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셀라) [5]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주님을 의지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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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세계교회가 기념하는 믿음의 선배 )> : 엘리자벳 프라이(Elizabeth Fry, 1780 – 1845) 여사
프라이 여사는 영국 노폭(Norfolk) 출신입니다. 20세에 신실한 퀘이커 교도이면서 런던에서 사업을 하던 조셉 프라이와 결혼해서 자녀를 물경 열하나를 낳았습니다.
그토록 많은 자녀를 낳았으면 의당 바쁜 집안 일로 인해서 사회에 나가서 봉사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라이 여사에게는 믿음과 은사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남편의 사업이 잘 되고 있어서, 그녀는 가사노동을 덜어줄 사람들을 고용하여 자신이 사회에 나가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828년에 이르러, 남편의 사업이 기울어지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을 때에도, 그녀는 가정을 돌보는 일과 사회활동을 겸행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사회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결혼 전 18세 때에, 윌리엄 세리버리라는 분의 설교를 듣고, 크게 각성하여, 그녀가 장차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할 것을 작정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남편이 속한 퀘이커 교단은, 신자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사명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라이 여사가 남달리 ‘감옥에 갇혀 있는 여성들’ 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그녀의 남편은 물론 그녀의 교회도 높이 존중해 주었습니다.
이런 확신과 이런 환경이 그녀의 교도소 선교활동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1813년 이미 여러 자녀들의 어머니가 되었던 프라이 여사는, 런던 뉴게이트 교도소의 여성재소자들이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교도소 안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서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비좁은 그 곳에는 교도관들이 모두 남자들 뿐이었고, 여재소자들이 교도관들에게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있는 실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비위생적인 환경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결수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이와 같은 사실을 사회에 알리고, 다른 신도들과 함께 교도소 상황을 개선하는 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 모임이 1816년에 이르러 ‘친우회’(The Society of Friends)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습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설교자로서 교도소를 출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면서, 영국 교도소에 여자 간수들이 처음으로 등장할 수 있었고, 교도소 내에 교육 프로그램들이 설치 되어, 출소 이후에도 생업을 가질 수 있도록 직업훈련을 시키는 일이라든지, 신앙생활을 돕는 성경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재소자들이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에, 대부분 런던 거리를 헤매던 노숙자들이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노숙자를 위한 쉼터를 마련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로 1823년에 영국 의회는 교도소법을 개정하게 되었는데, 이 일에 프라이 여사의 공로가 컸던 것입니다. 프라이 여사의 생시에 영국 만이 아니고 유럽의 나라들이 그녀의 영향을 입어 교도소 행정에 많은 개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프라이 여사가 이토록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일하게 한 동력은 그녀가 좋아하던 요절 말씀에서였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십시오.”(갈 6:2) ‘남의 짐’을 ‘내 짐으로 져 주는 것’, 이것이 프라이 여사를 있게 한 동력이었습니다. 할렐루야!
1845년 10월 12일 프라이 여사는 그녀의 역동적인 65년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녀가 남긴 ‘교도소 방문자들에게’ 라는 글이 있어서 여기 소개해 올립니다:
“방문자께서는 판단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들어가세요. 미안하지만, 자기 자신이 여기 계신 분들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 말씀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다.’(롬 3:23)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누가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 같은 처지의 동료를 만나신다고 생각하시고 들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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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 하나님, 고마운 믿음의 선배 프라이 여사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교도소와 구치소 안에 갇혀 있는 한국의 6만 명의 형제 자매들과 세계 여러 나라의 1,170만 명의 형제 자매들을 저희의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들의 삶이 가치있는 삶이 되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더불어, 저희도 그들을 자주 가서 돌보고,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을 함께 나누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